한국에서도 '반(反)지뢰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97년 11월 6일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가 발족됐다. 이미 한국 밖에서는 그 해9월17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전 세계 89개 참가국의 합의로 '대인지뢰금지협약'을 통과시켜 놓고 있었다. 그런 외풍에 힘입어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발족했지만 한국에선 아직 반지뢰 운동이 시기상조였다. 우선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태클을 걸었다. 미국은 '대인지뢰의 생산과 사용을 즉각 중지해야 하고, 10년 이내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해야 한다'는 이 협약에서 한반도 DMZ의 지뢰는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기 위한 특수한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국제대인지뢰대책회의(ICBL)나 '반(反)지뢰' NGO들이 인정할리 없었다.
"좋다. 그러면 우린 나가겠다."
미국은 한반도 DMZ가 예외지역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대책회의에서도 탈퇴했다. 어차피 중국이나 러시아 등 지뢰강국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는 마당에 미국이 대책회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밖의 상황은 더욱 좋지않게 변해갔다. '대인지뢰금지협약'은 1999년 3월 1일 43개국의 비준을 얻어 발효됐다. 그리고 2000년 9월 15일 제2차 국제대인지뢰금지조약 당사국 회의 때는 가입국이 139개국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지뢰 강국들 즉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 파키스탄, 이집트, 이스라엘, 이란은 이 협약을 외면하고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139개 가입국이 보유하고 있는 지뢰는 고작 2,500만 개다. 그러나 9개 미가입국의 보유지뢰는 2억 2,500만 개에 달했다. 협약 발효 후 1,900만 개의 지뢰가 폐기됐다. 그러나 그런 반지뢰운동은 '지뢰 약소국들만의 잔치'였다.

-----중략-----

강원도 철원의 한 민통선 북방지역엔 마을 사람만 아는 '지뢰무덤'이 있다. '지뢰무덤'이란 개간지에서 파낸 지뢰를 한 곳에 모아 작은 돌무덤처럼 쌓아 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철원군 갈말읍에서 만난 40대 농민은 그 무덤을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대를 물려 만든 그 무덤은 고인돌이나 패총 같은 현대한 선사유적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건 절대 비밀이라며 나를 그 곳으로 안내해 주지 않았으며, 그 무덤의 위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빌면 농지를 개간할때 '저기 지뢰가 있다'고 공개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짓이었다. 개간지의 지뢰는 반드시 군부대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개간지에서 발견된 지뢰는 군인들에게도 골치 아픈 존재다. 군인들은 일단 지뢰가 발견된 지역은 지뢰표지판을 세우고 다음 조치를 기다린다. 지뢰표지판이 세워진 지역은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농지개간은 거기서 끝이다. 따라서 농민들에게는 혹시 지뢰가 발견되더라도 신고하지 않는 쪽이 늘 유리했다. 그 '지뢰무덤'은 그렇게 생겼다는 것이다.

"위험할 텐데 지금이라도 그 '선사유적'을 발굴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그렇게 걱정하자 그는 민통선에서는 지뢰피해자가 되고 안되는것은 팔자소관이라고 말했다. DMZ군이들에게 '지뢰군번'이 있듯이 민통선 농민들에게도 '지뢰주민등록번호'가 있다는 것이다. 군번(軍番, service number)이란 군인 각자에게 부여되는 고유번호이다. 인식표(認識票, idintification tag)는 군인의 성명과 군번, 혈액형이 새겨져 있는 길이 5cm, 폭 3cm의 타원형의 얇은 알루미늄 판이다. 모든 군인은 인식표를 잠잘 때, 샤워를 할 때도 항상 목에 걸고 있도록 되어 있다. 인식표가 전사자나 부상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그 인식표에 새겨진 군번 가운데는 '지뢰군번'이 있다고 믿고 있다. DMZ수색조는 맨 앞에 선 분대장이 반드시 지뢰를 밟는 것은 아니다. 확률상 맨 앞 사람이 지뢰에 가장 위험하지만, 사고는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맨 뒷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뢰를 밟는 것은 군인이 될 때부터 군번과 함께 '운명의 장난'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는 출생신고 때 받아 사망신고 때 말소되는 한국인의 고유번호다. 민통선 사람들도 '지뢰주민등록번호'가 있다고 믿고 있다. 지뢰밭을 들어가는 사람이 다 지뢰를 밟는다는면 아마 드넓은 철원평야나 파주평야는 개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많은 민통선 사람 가운데 지뢰를 밟는 몇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지뢰를 밟는 '팔자소관'도 부여 받았다는 것다.

민통선 사람들은 지뢰패해자를 그렇게 '지뢰주민등록번호'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이라고 분류하고 있었다. 일단 가장이 지뢰사고로 사망하거나 다리를 잃은 세대는 노동력을 상실해 더 이상 농지를 확장할 수 없었으며, 이웃과 품앗이도 할 수 없게 됐다. 지뢰패해자들은 가난을 대물림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만손씨 같은 사람은 정말 팔자가 기구한 노인이다. 민통선 사람들은 대개 맨몸으로 민통선 북방지역에 입주했다. 지뢰가 그들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라놓은 것이다.

Posted by 함광복

2007/08/22 11:31 2007/08/2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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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내게 산맥을 넘어가 보라고 했다. DMZ속으로 연어 떼가 치닫는 시퍼런 남강(南江)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며, 고미성(古美城)이라고 하는 작은 성터도 있다는 것이다. 1984년 여름이었다.

- 함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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