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면이 탄생하던 1983년 현재 경기도 연천,파주,김포,강화군, 강원도 고성,인제,화천,양구,철원의 민통선 북방지역 81개 지역에는 총 8,799세대 3만 9,725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도 정책적으로 민통선 북방지역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1954년 2월 3일, UN군사령부는 수복지구, 즉 휴전 후 남한 땅이 된 북위 38선 이북의 DMZ 이남 땅, 해방 후 북한통치를 받다가 휴전협정으로 남한에 귀속된 땅에 대한 행정권을 한국정부에 이양했다. 미 8군사령관은 DMZ의 군사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할 완충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DMZ남쪽 5~20km밖에 귀농선(歸農線)을 설정했다. 그 선을 넘어 들어가 영농은 할 수 있었으나 거주는 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1959년 6월 11일 DMZ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게 됐다. 한국군은 갈대밭으로 변해 버린 귀농선 북쪽의 옛 논과 밭을 개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귀농선을 민간인 통제선(민통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 선 너머로 민간인을 입주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귀농선은 별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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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분지 남쪽 만대리는 분지 바닥에 낮은 산맥이 구릉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군인들은 이 구릉지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해안분지의 북쪽 벽에 'V'자 홈이 해여 있다. 만대리에서는 그 홈을 통해 북한군이 밀집해 있는 매봉(1,290m)이 빤히 보였다. 그 'V'자 홈을 통해 매봉에서도 만대리가 바라다 보일게 뻔했다. 그들에게 해안분지의 사람들이 무척 잘 산다고 선전할 필요가 생겼다. 1972년 해안분지에 2차 개척민들이 들어와 만대리에 장착하자마자 멋진 집을 짓고 지붕을 주황색이나 하늘색으로 칠한 것은 바로 그런 필요에 따른 것이다. 잘사는 척 해 보이는 그런 선전전은 북한이 오래 전부터 써 먹던 방법이다. 그들은 남쪽에서 잘 보이는 곳에 아파트나 집단촌을 건설해 놓고 남한 병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완전한 선전용 건물도 있었다. 군인들은 그런 건물은 연극세트처럼 한쪽 벽만 만들어 세우고 뒤쪽은 각목으로 받쳐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째든 남쪽에서도 북쪽의 그런 계획적인 '선전촌'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1968년 이후 민통선 북방지역에는 만대리 같은 '전략촌'이 줄줄이 들어섰다. 강원도 철원군에 가장 많은 전략촌이 생겼다. 철원 사람들의 일상에는 민통선 북쪽을 지칭하는 '민북'과 그 이남 '민남'이란 용어가 있다. 민북은 철원평야60%가 들어앉아 있는 노른자위 땅. 그대로 방치되던 이 땅을 농경지로 재가동하고 대북 선전효과를 거두기 위해 대대적 정책이주가 단행됐다.
1959년 4월 10일 철원읍 관전리에 32세대가 입주할 때까지 11차례에 걸쳐 총 975세대가 집단이주 했다. 철원 한 곳에서만 1,000호가 민통선 북방지역으로 정책이주를 한 것이다. 그것은 '1,000호의 정책사민'이나 다름없었다.
사민(徙民)의 사전적 의미는 '백성을 이주시켜 국토를 개척하는 정책적 이주'이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6진을 개척하기 위해 남방 각 도의 백성을 이주시킨 것 같이 조선조가 단골메뉴로 써먹던 인구이동정책이다. 그러나 사민은 이미 10세기 초 궁예가 철원에서 개발한 아이디어이다. 1,000년 전 철원에서 '청주(淸州) 사민(徙民) 1,000호'의 대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905년 궁예는 송악(개성)을 버리고 1년 전 완공한 철원성으로 천도한다. 그는 이미 904년 7월 청주 사람, 1,000호를 철원성으로 이주시켜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 사학자들은 당시 촌락의 한 집 식구를 10명으로 잡는다. 그렇다면 1만 명의 집단 이주다. 조선시대 압록강 유역의 여덟차례 사민 인구를 '1,000호 1만 5,00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집 식구를 15명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렇다면 청주 사민은 1만 5,000명까지 늘려 잡을 수도 있다. 이 가운데 20~60세의 경제 인구를 8,000~1만명으로 잡는다면, 그리고 이 가운데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남자를 4,000~5,000명으로 잡는다면, 당시로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한 국가의 이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인구이동을 일거에 해치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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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불이농장은 경상도에서도 소작인을 모집해 왔다. 권, 이, 손, 김씨등 4개 성씨 10세대가 장흥2리 신촌에 '경상도촌'을 세웠다. 일본의 한국 강점기 그들의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한국 남부 농촌 인구는 끊임없이 북부 광공업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평안촌민은 북쪽에서, 경상도촌민들은 남쪽엣 한반도 한가운데로 가기를 택했다. 땅, 넓은 농지가 그들을 유혹했을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말, 1959년부터 1980년까지 철원에서는 민통선 민간인 이주 정책으로 '1,000호 대사민'이 이뤄졌다. DMZ를 따라 이어진 또 하나의 벨트, 민통선 북방지역으로의 집단이주는 20세기 최대의 정책 사민이었다.
Posted by 함광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