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지의 3차 개척민들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책 이주민들이 아니었다. 대관령 일대에서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민들이 신천지를 찾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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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랭지 채소란 바로 이 비생산기간인 여름에 배추를 출하하는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농사방법이며 따라서 소득도 높았다. 대관령 주민들은 바로 배추생육조건을 찾아 해안분지로 이주한 '고랭이채소 이민'인 것이다.
분지의 서늘한 기후를 찾아 이번에는 감자가 들어왔다. 감자는 비교적 한랭한 기후에스 잘 자라며 감자 산지는 대부분 연평균 기온이 4.5~10도인 지대이다. 연평균 기온이 9.2도인 해안분지는 감자농사의 최적지였는데도 그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감자의 한국 전래에 대해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청나라 사람이 고려인삼을 몰래 캐 가려고 왔다가 떨어뜨리고 갔다는 설이 있다'고 적고 있다. 사실 해안분지의 감자도 인삼을 쫓아 분지로 들어왔다. 1945년까지만 해도 지금은 DMZ속에 묻혀 있는 양구군 수입면 백현리와 방산면 건솔리에는 30정보의 인삼밭이 있었다.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양구 인삼이 너무 질이 좋아 '개성 삼이 울고갔다'는 말도 있다. 1975년 양구에서는 '옛 백현리 인삼을 재현하지'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포 삼업(蔘業)조합 기술자들을 초청해 어디가 인삼재배의 적지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해안분지의 만대리 오유리를 최고 적지로 꼽았다. 1982년 분지에 인삼재배단지가 조성됐다. 뒤쫓아 감자가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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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농촌의 이농현상처럼 해안분지에서도 분지를 탈출하는 이주현상이 일어났다. 3년 또는 5년 주기로 찾아오는 여름 냉해가 원인이었다. 6~7월 분지동쪽 달산령을 넘어 샛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얼음장처럼 차고 날카로운 바람이다. 만생종 벼는 한창 꽃을 피울 때이고 조생종은 막 이삭이 맺는 시기다. 하지(夏至)의 햇살에도 별똥별이 파놓은 거대한 '가마솥'은 데워지지 않았다. 개척민들이 처음 분지 속으로 들어오던 해도 달산령 너머에서 샛바람이 불어왔다. 처음엔 그 샛바람이 농사를 망쳐 놓는 것인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바람이 일정한 주기로 불어오며 농사를 망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어떤 때는 샛바람이 강풍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이상한 새 떼가 바람에 밀려 날아온 적도 있었다. 분지 바닥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가 사라져 버린 그 흰 새 떼를 분지의 사람들은 갈매기라고 믿고 있었다. 동해의 갈매기 떼가 강풍에 떠밀려 분지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동해는 달산령 너머 가까운 곳에 있었다.

토지분쟁으로 하루아침에 소작인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겨울을 날 일이 막막했다. 토지분쟁이란 민통선 북방지역 전역에서 원소유권자와 개척민 사이에 빚어졌던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개척민들이 지뢰밭은 옥토로 바꾸어 놓자, 그 땅의 진짜 소유권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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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토지 소유권자에게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해안분지에서 개척민의 땅 36.5ha가 토지 분쟁에 휘말렸으며 그 땅은 모두 원소유권자에게 넘어갔다. 개척민들은 '빼앗긴 땅'을 매입하거나 소작농이 되어 임대영농을 했다.
예전 같으면 그들 소작농이 이듬해 가을까지 그대로 배를 주리고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분지의 사람들도 바깥세상을 알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후보지가 해안분지'라는 주민들의 권고는 씨가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분지 밖에서는 올림픽 건설 특수로 어디를 가나 일자리가 있었다. 그해 겨울 많은 가장들이 분지 밖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다시 분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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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9일, 해안분지 제4땅굴 앞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육군21사단 조영철 중사(27)가 23세 신부를 맞고 있었다. 사단장이 주례를 맡았다. 많은 장,사병들이 하객으로 참여해 축하했고, 사단 군악대도 웨딩마치를 울려줬다. 시랑 조중사는 국방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 "새 천년을 맞아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제4땅굴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땅굴 구경을 왔던 안보관광객을은 이런 상징적인 결혼식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제4땅굴은 이 부대의 전투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1983년 5월 북한군 13사단 민경수색대대 참모장 신중철 대좌(당시36세)가 강원도 양구 동북방 사태리 계곡을 통해 귀순했다. 사태리 계곡은 이부대가 방어하고있는 단장의 능선 오르쪽 골짜기이다. 옛 31번 국대가 지나가는 깊고 좁으며 긴 협곡이다. 3개월 전 북한 공군 이웅평 대좌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다. 그러나 북한 육군 장교는  미그기보다 더 값진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을 긴장시켰다. 그는 북한이 개전1주일내 남한 전역을 점령한다는 '5~7일 남침작전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히면서 그 작전계획의 일환으로 '양구 동북방에 땅굴이 있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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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지에는 개척초기부터 전설 같은 교육기관이 있었다. 해안초등학교는 분지에 첫 개척민이 들어 온지 1개월3일 만인 1956년 5월28일 현1리 208번지에서 천막학교로 개교했다. 당시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은 과거 북한교육을 받던 곳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정부정책은 학생이 있는 곳은 학교부터 세운다는 것이었다. 학교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주민들이 민주주의에 빨리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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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분지는 민통선 2세대들, 1950년생에서 1960년생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그 분지의 엘리트들은 모두 '영한중학' 출신들이다. 김종희 관장은 영한중학 3회 졸업생이다. 그들은 김관장처럼 공무원이 돼 있거나, 이장, 새마을 지도자, 대규모 고랭지 채소농가 등이 돼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자제나 어린 동생들을 '영한'의 후신인 '해안중학'을 졸업시키고 있다. 해안중학 출신들은 양구, 춘천, 서울 등지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연간20여 명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며 사회 각계에 진출한 그들은 고향의 아버지, 형님들의 훌륭한 후원자들이 되고 있다.

농촌의 관습대로 민통선 1세대들도 환갑을 전후해 자녀들에게 일손을 넘겨주었다. 김관장은 그 시기를 대개 1980년대 중반으로 보고 있었다. 해안면사무소는 2001년 11월 현재 해안분지의 경지면적을 밭 1,820ha, 논 539ha로 집계했다. 1980년대에 비해 논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밭은 3배 가까이 확대됐다. 밭은 80%가 무, 배추, 감자 등 고랭지 채소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그런 영농구조 개편은 민통선 2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산업구조도 다양해졌다. 18개의 유흥음식점, 4개의 여관, 여인숙외 중장비업, 부동산업도 등장했다. 그런 비영농 업종도 민통선 2,3세대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1978년 2,437명이던 인구는 2001년 11월 현재 1,540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인구통계는 실제 해안분지에 거주하는 인구와 많이 달랐다. 분지에서는 자녀들을 위한 '교육이주'가 유행하고 있었다. 분지에 살면서도 자녀의 학교가 있는 대도시로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방법이다. 실제로 분지의 인구는 남자 836명, 여자 704명으로 성비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대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는 춘천으로 마누라 주민등록을 옮겨놓았조. 서류상 난 홀아비입니다."
한 민통선 2세가 성비의 균형이 맞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Posted by 함광복

2007/07/13 13:25 2007/07/1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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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내게 산맥을 넘어가 보라고 했다. DMZ속으로 연어 떼가 치닫는 시퍼런 남강(南江)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며, 고미성(古美城)이라고 하는 작은 성터도 있다는 것이다. 1984년 여름이었다.

- 함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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