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분지가 운석분지로 세상에 태어난 그 해 역시 세상에 태어난 유수진씨에게 내가 DMZ 일대를 여행하면서 가장 감동적으로 보았던 얘기를 해줬다. '흥부새', 그 얘기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곳에 살 자유가 있으며 누가 멋진 역사를 쓰느냐는 것도 자유'라는 사실을 내게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쇳소리를 내며 날아오른다는 새벽 새 떼를 보러갔다.
지뢰밭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는 철원 양지리의 토교저수지의 새벽 새떼를 보기 위해 늦은 오후 민통선 검문소를 지나갔다.
지뢰 덕분에 온전히 늙어갈 수 있는 버드나무들이 허연 살을 드러내고 있는 숲 띠가 한탄강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강을 건너 숲을 지나면 들판이다. 동쪽, 서쪽 어느 쪽으로도 누이 모자라게 아득히 철원 뜰이 펼쳐졌다. 낮은 산 양지 쪽으로 양지리(陽地里)가 앉아 있었다. 언덕 위의 작은 교회 하얀 종탑은 그때 저녁 해를 받고 있었다.

-----중략-----

민통선 밖에서 "철새가 찾아오는 양지쪽 맑은 물로 농사를 짓는 양지리 쌀이 으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양지리 오대쌀 인기가 올라갔다. 누군가 논에 청둥오리를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해충 잡아먹고, 논 김매고, 도랑치고, 가재잡고...."기분 좋은 농사였다. 이번엔 쌀값이 올라갔다. DMZ고엽제 파동으로 철원쌀 인기가 말이 아닌데도 정작 양지리 DMZ쌀은 앉은 자리에서, 그것도 몇 만원씩 값을 더 받고 팔아버렸다.

철원평야 한 쪽 끝에서 시샘이 일어났다. "새가 돈을 몰고 왔대. 양지리만 흥부가 사나? 우리도 새 밥을 줍시다." 이웃 연천 사람들마저 "한 발짝만 더, 한 발짝만 더 서쪽으로..." 하며 철원 새가 연천에도 와 살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새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새벽 새가 비상하는 것도 볼거리고 새터 싸움도 볼거리라며 새 관광을 오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백씨는 떠밀리듯 민박을 열었다. 그리고 새구경하는 집이면 창문이 커야 한다며 한 쪽 벽을 헐었다는 것이다.

백씨의 얘기가 잠시 숨을 고를 때마다 호수가 울었다. 호수 가득 내려앉아 있을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둑을 넘어와 유리창을 흔들고 있었다. 백씨는 "저 호수는 겨울 밤 내내 개구리 울음 소리를 낸다."고 말했다.

나는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이 그대로 들어와 앉은 거다란 창문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사람이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다면 나는 서로 새를 사랑하겠다고 전쟁을 하는 이상한 나라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오전 7시 어두운 호수는 분주했다. 두꺼운 검은 띠가 호수를 가로질러 있었다. 7시 5분, 검은 띠 한 쪽 끝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그 큰 호수를 들어올릴 것 같은 회오리 바람이 일어났다. 뒤따라 폭풍우 소리가 일어났다. 아니 비행기가 뜰 때 같은 폭음이 일어났다. 쇠기러기는 쇳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수천, 수만 장의 손수건이 날아올랐다. 손수건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높이 날아 올랐다. 그리고 서쪽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7시 20분 검은 띠 한 쪽에서 또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여명이 트는 동쪽으로 날아갔다. 7시35분, 또 회오리 바람이 일어났다. 그들은 남쪽으로 날아갔다. 관제탑에서는 정확하게 15분 간격의 이륙을 지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드시 전 편대의 역방향 비행을 명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동산 쪽일 것이다. 동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막 마루턱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비상이 시작됐다. 검은 천 조각들이 푸르르 피어 올랐다. 그것들은 다시 어마어마하게 큰 흰 포장이 되어 동산을 뒤덮어버렸다. 뒤따라 세상의 뾰족한 소리를 다 모아 온 것 같은 소리가 쫓아와 우박처럼 쏟아졌다. 나는 그때 비행기의 뱇처럼 엄청 크고 미끈한 기러기들의 하얀 배를 쳐다보았다. 빈 하늘에서 나풀나풀 깃털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안아보면 한 아름이나 될 만한 몸통 밑에 하얀 솜털로 감싸인 멋진 배에서 깃털 하나가 떨어져 들판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 흥부새. 마음 착한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 줘 부자를 만들어 준 흥부전의 그 새.

Posted by 함광복

2007/08/01 15:25 2007/08/01 15:25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dmzline.com/rss/response/17

1986년 그 해는 '124군부대 청와대 습격', '미 프에블로호 납치', '울진 삼척 무장간첩 침투' 등 언제라도 전쟁 불씨가 될 대형사건이 숨가쁘게 터진 해다. DMZ가 분지의 북쪽 벽으로 지나가는 해안분지는 늘 초비상 상태였다. 민간인들에게도 등화관제 지시가 떨어졌다. 등화관제는 분지 사람들에게 초기 개척시대부터 해오던 것이어서 아주 익숙한 야간 훈련이다. 박씨는 한밤중 소변이 급했다. 일어나 호롱불을 밝혔다. 담요로 문을 가렸기 때문에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무심코 방문을 여는 그를 군인들이 연행했다. 방금 불빛이 새어나왔다는 것이다. 해안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여럿 나와 있었다. 그들은 드럼통을 굴리며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새파란 나이의 군인들로부터 기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로부터 얼차려를 받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다. 다만 최근엔 군인들이 그런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중략-----

광주산맥의 대성산 북쪽 산기슭에도 또 하나 민통선 마을이 숨겨져 있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근남면 마현1리는 마을 뒤로 광주산맥의 주능선이 흘러가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동쪽 말고개에서 갈라진 또 다른 능선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며 이 마을을 계곡 속으로 가둬놓고 있다. 단 한군데 서쪽으로만 휑하게 트여 멀리 김화 벌판과 철원평야로 흘러가는 남대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서쪽벌판에서는 늘 북서풍이 불어왔다. 바람은 말고개에 막혀 계곡 속을 오랫동안 휘감다가 스스로 잦아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현상을 '바람돌이'라고 불렀다. 북서풍이 부는 겨울은 바람돌이가 더 심했다. 한 번 스쳐 지나가면 될 칼바람이 두 번, 세 번씩 지붕 위를 스쳐 가는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이 북향이면서도 눈이 빨리 녹는 이유는 녹는것이 아니라 바람이 날려 보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처음 남쪽에서 와서 우리가 얼마나 추웠겠어요?"
1990년 2월 그 마을을 찾아갔을때, 그 '바람돌이' 얘기를 해주던 도옥이(都玉珥)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 마을에 살지 않았다. 민통선 1세대들은 이제 86세의 최고령 장내경 할아버지와 할머니 7분이 생존해 있었다. 그때 133세대 391명이던 마을 인구는 119세대 406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처가가 있는 마을로 이사 온 집, 마현리에서 굶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살러 온 두 할머니, 하사관으로 전역한 전직 군인 등이 새 얼굴이었다. 1990년 2월 현재 137명의 어린이가 다니던 마현초등학교는 47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중략-----

'바람돌이'란 말은 그 마을을 개척한 민통선 1세대들이 붙인 지명이다. 바람돌이 밖에서는 그 마을을 '울진촌'이라고 불렀다. 경상북도 울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1959년 9월 17일 추석날이다. 이미 제주도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태풍 사라호가 이날 아침 남해안에 상륙했다. 중심기압 965mmb, 중심 풍속 초속 46.9m의 강력한 태풍은 남한 전지역에 골고루 267.5mm의 비를 쏟아놓고 경북 울진 지방을 통해 동해로 빠져나갔다. 이재민 25만 5천명, 사망 750명, 부상 2,200명, 건물파괴 12만 1천동, 선박피해 6,600척의 피해규모는 아직도 사상최고 기록이다. 울진은 그 해 가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수확을 포기한 채 맞는 그 해 겨울도 모질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겨울 뒤에 맞는 봄을 더 두려워했다. 울진군은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편입됐다. 따라서 당시 울진군의 이재민 긴급구호 대책은 강원도지사가 세우고 있었다. 겨우내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마현1리 민통선 북방지역의 정책이주 계획이 수립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66세대 200명(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는다.)의 민통선 개척단이 구성됐다. 모두 울진읍 내 이재민들이었다.

-----중략-----

1960년 4월 4일.
아침 일찍 울진초등학교에서 울진군민 환송식이 있었다. 다시 못 볼지 모른다며 일가친척들이 모두 나와 배웅했다. 25대의 군용트럭에 나눠 탔다. 빈 몸으로 가도 된다는 말만 듣고 모두 가재도구는 없었다. 한 집에 보따리 한 개씩이었다. 맨 앞에서 헌병 지프가 호송하고 맨 뒤에는 앰뷸런스가 뒤따르는 긴 행렬이었다. 삼척에 도착했을 때 점심이 트럭 위로 올라왔다. 더운물에 분유를 진하게 탄 우유물이었다. 남자들과 아이들은 후룩 들여 마셨지만, 여인들은 비린내가 난다며 마시지 않았다. 여인들은 그때 대부분 분유물을 처음 먹어봤다. 벌써부터 우는 여인들도 있었다.

-----중략-----

1960년 4월 7일.
말고개(馬峴)를 넘었다. 누군가 "저기다"하고 소리 쳤을 때,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대부분 말이 없었다. 논과 밭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빽빽한 아카시아나무 숲 건너편에 군용천막이 줄을 맞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군인들이 저런데서 사는가 보다."라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트럭은 그 천막촌을 향해 가고 있었다. 66채의 천막이 이마를 맞대고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세대주의 이름을 부르면 "넷"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한 집씩 천막 속으로 들어갔다. 천막 속 땅바닥은 질척하게 물이 고여 있었다. 군인들이 마른 풀 한 아름과 가마니 두 장씩을 천막 안으로 넣어주었다. 이어 행동지침이 시달됐다. 장교는 가장들을 일렬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오라고 말했다. 천막촌을 중심으로 커다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동그라미 밖은 지뢰밭입니다. 지뢰는 아이도, 할아버지도 몰라봅니다. 아셨습니까?"
장교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겁을 주었다.
"전방에 무엇이 보입니까?"
장교가 가리키는 쪽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산 뒤로 검은 산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교는 그 검은 산은 북한 땅이며 지금 북한군이 우리를 째려보고 있을 것이라고 또 겁을 주었다.
"그러니까 밤에 불을 밝혀도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장교는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됩니다."

그렇게 답변해야 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들 정말 겁을 먹고 있었다. 식량이 배급됐다. 천막마다 청보리쌀이 1가마씩 놓였다. 울진에서는 그 청보리쌀을 논갈이가 시작될 때나 송아지를 낳았을 때 어미 소에게 삶아주던 사료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들 떠나버렸다. 울진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최전선의 지뢰밭 한가운데 내팽개쳐진 사실을 알았다.

-----중략-----

울진촌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기 전 '3.15 대통령 선거'를 치뤘다. 그들도 김화에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이승만 대통령에게 몰표를 보내는데 한 사람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로 4.19학생의거가 일어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식량과 농기구를 보내 주겠다던 도지사는 깜깜무소식이었다. 군수도 오지 않았다. 면서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새 정부는 그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행정의 사각지대에 내던져진 난민 신세가 돼버렸다. 이번에도 50연대장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부대 지휘권 지역에 내팽개쳐진 난민들을 구제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천막촌에 쌀을 나눠주며 "술을 담궈 보라."고 묘한 암시를 했다. 연대장은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천막촌에 술이 익자 군인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술값을 지불했다. 눈치 빠른 몇 사람이 그 돈으로 화천 사방거리에서 쌀을 사와 또 술을 담궜다.
"군인들이 와서 술을 마시고 간 뒤엔 군부대에서 '빳다' 맞는 소리가 철썩철썩 들려요. 그래도 이튿날 밤엔 또 찾아와 술을 팔아 줬지."
"그땐 군인들도 잘 못 먹을 때야. 그 쌀을 빼앗아다가 술을 담궈 먹이고 매를 맞히니 군인들이 기합 받는 밤엔 천막촌도 숨을 죽이고 같이 맘을 아파했지요."
"그때 군인들이 없었다면 우린 다 굶어 죽었을 거야."
도씨 할머니와 노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그 연대장을 '대령'으로 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양념 물에 덤벙 담갔다 꺼내 항아리 속에서 익히는 '덤벙 김치'는 울진 사람들도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러나 민통선 속에 고립돼 반세기 가까이 바깥세상의 때가 안 탄 울진촌에는 그 김치가 전수되고 있었다. 울진촌의 반찬은 산나물 무침은 말할 것 없고, 국도, 찌개도 유난히 짜고 맵다. 1989년 고향 울진의 일가친척들이 버스를 대절해 울진촌을 찾아온 일이 있다.
"그래 이 맛이야. 이게 옛 우리 울진 맛이야."
울진촌 주부들은 그때 고향 사람들이 여기 맛이 더 울진 맛이라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마현초등학교 허남황 교무주임은 2001년 3월 이 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말 속에 짙게 묻어 있는 경상도 억양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투를 아버지가 따라 배우고, 아버지의 말투를 아이들이 따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랜 고립이 '울진촌의 울진 말'을 보존한 것이다. 김종호 이장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어른들이 이 마을에 남겨 놓은 것이 또 있어요, 울진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도전과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놓은 개척정신이지요. IMF때 대도시 실업자들이 좀 많이 귀향을 했습니까? 그러나 우리 마을엔 단 한명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버지, 할아버지들 한테서 배운 것이지요."

Posted by 함광복

2007/07/18 22:44 2007/07/18 22:44

분지의 3차 개척민들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책 이주민들이 아니었다. 대관령 일대에서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민들이 신천지를 찾아 온 것이다.

----중략-----

고랭지 채소란 바로 이 비생산기간인 여름에 배추를 출하하는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농사방법이며 따라서 소득도 높았다. 대관령 주민들은 바로 배추생육조건을 찾아 해안분지로 이주한 '고랭이채소 이민'인 것이다.
분지의 서늘한 기후를 찾아 이번에는 감자가 들어왔다. 감자는 비교적 한랭한 기후에스 잘 자라며 감자 산지는 대부분 연평균 기온이 4.5~10도인 지대이다. 연평균 기온이 9.2도인 해안분지는 감자농사의 최적지였는데도 그걸 미처 몰랐던 것이다. 감자의 한국 전래에 대해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청나라 사람이 고려인삼을 몰래 캐 가려고 왔다가 떨어뜨리고 갔다는 설이 있다'고 적고 있다. 사실 해안분지의 감자도 인삼을 쫓아 분지로 들어왔다. 1945년까지만 해도 지금은 DMZ속에 묻혀 있는 양구군 수입면 백현리와 방산면 건솔리에는 30정보의 인삼밭이 있었다.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양구 인삼이 너무 질이 좋아 '개성 삼이 울고갔다'는 말도 있다. 1975년 양구에서는 '옛 백현리 인삼을 재현하지'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포 삼업(蔘業)조합 기술자들을 초청해 어디가 인삼재배의 적지인지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해안분지의 만대리 오유리를 최고 적지로 꼽았다. 1982년 분지에 인삼재배단지가 조성됐다. 뒤쫓아 감자가 들어온 것이다.

-----중략-----

여느 농촌의 이농현상처럼 해안분지에서도 분지를 탈출하는 이주현상이 일어났다. 3년 또는 5년 주기로 찾아오는 여름 냉해가 원인이었다. 6~7월 분지동쪽 달산령을 넘어 샛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얼음장처럼 차고 날카로운 바람이다. 만생종 벼는 한창 꽃을 피울 때이고 조생종은 막 이삭이 맺는 시기다. 하지(夏至)의 햇살에도 별똥별이 파놓은 거대한 '가마솥'은 데워지지 않았다. 개척민들이 처음 분지 속으로 들어오던 해도 달산령 너머에서 샛바람이 불어왔다. 처음엔 그 샛바람이 농사를 망쳐 놓는 것인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바람이 일정한 주기로 불어오며 농사를 망친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어떤 때는 샛바람이 강풍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이상한 새 떼가 바람에 밀려 날아온 적도 있었다. 분지 바닥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가 사라져 버린 그 흰 새 떼를 분지의 사람들은 갈매기라고 믿고 있었다. 동해의 갈매기 떼가 강풍에 떠밀려 분지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동해는 달산령 너머 가까운 곳에 있었다.

토지분쟁으로 하루아침에 소작인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겨울을 날 일이 막막했다. 토지분쟁이란 민통선 북방지역 전역에서 원소유권자와 개척민 사이에 빚어졌던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개척민들이 지뢰밭은 옥토로 바꾸어 놓자, 그 땅의 진짜 소유권자가 나타났다.

-----중략-----

결국 토지 소유권자에게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해안분지에서 개척민의 땅 36.5ha가 토지 분쟁에 휘말렸으며 그 땅은 모두 원소유권자에게 넘어갔다. 개척민들은 '빼앗긴 땅'을 매입하거나 소작농이 되어 임대영농을 했다.
예전 같으면 그들 소작농이 이듬해 가을까지 그대로 배를 주리고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분지의 사람들도 바깥세상을 알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후보지가 해안분지'라는 주민들의 권고는 씨가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분지 밖에서는 올림픽 건설 특수로 어디를 가나 일자리가 있었다. 그해 겨울 많은 가장들이 분지 밖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다시 분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2000년 4월 9일, 해안분지 제4땅굴 앞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육군21사단 조영철 중사(27)가 23세 신부를 맞고 있었다. 사단장이 주례를 맡았다. 많은 장,사병들이 하객으로 참여해 축하했고, 사단 군악대도 웨딩마치를 울려줬다. 시랑 조중사는 국방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 "새 천년을 맞아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제4땅굴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땅굴 구경을 왔던 안보관광객을은 이런 상징적인 결혼식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제4땅굴은 이 부대의 전투력을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1983년 5월 북한군 13사단 민경수색대대 참모장 신중철 대좌(당시36세)가 강원도 양구 동북방 사태리 계곡을 통해 귀순했다. 사태리 계곡은 이부대가 방어하고있는 단장의 능선 오르쪽 골짜기이다. 옛 31번 국대가 지나가는 깊고 좁으며 긴 협곡이다. 3개월 전 북한 공군 이웅평 대좌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다. 그러나 북한 육군 장교는  미그기보다 더 값진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을 긴장시켰다. 그는 북한이 개전1주일내 남한 전역을 점령한다는 '5~7일 남침작전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히면서 그 작전계획의 일환으로 '양구 동북방에 땅굴이 있다'고 폭로했다.

-----중략-----

분지에는 개척초기부터 전설 같은 교육기관이 있었다. 해안초등학교는 분지에 첫 개척민이 들어 온지 1개월3일 만인 1956년 5월28일 현1리 208번지에서 천막학교로 개교했다. 당시 북위 38도선 이북지역은 과거 북한교육을 받던 곳이기 때문에 이들 지역에 대한 정부정책은 학생이 있는 곳은 학교부터 세운다는 것이었다. 학교는 공산주의 교육을 받은 주민들이 민주주의에 빨리 적응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중략-----

지금 분지는 민통선 2세대들, 1950년생에서 1960년생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그 분지의 엘리트들은 모두 '영한중학' 출신들이다. 김종희 관장은 영한중학 3회 졸업생이다. 그들은 김관장처럼 공무원이 돼 있거나, 이장, 새마을 지도자, 대규모 고랭지 채소농가 등이 돼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자제나 어린 동생들을 '영한'의 후신인 '해안중학'을 졸업시키고 있다. 해안중학 출신들은 양구, 춘천, 서울 등지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연간20여 명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며 사회 각계에 진출한 그들은 고향의 아버지, 형님들의 훌륭한 후원자들이 되고 있다.

농촌의 관습대로 민통선 1세대들도 환갑을 전후해 자녀들에게 일손을 넘겨주었다. 김관장은 그 시기를 대개 1980년대 중반으로 보고 있었다. 해안면사무소는 2001년 11월 현재 해안분지의 경지면적을 밭 1,820ha, 논 539ha로 집계했다. 1980년대에 비해 논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지만 밭은 3배 가까이 확대됐다. 밭은 80%가 무, 배추, 감자 등 고랭지 채소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그런 영농구조 개편은 민통선 2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산업구조도 다양해졌다. 18개의 유흥음식점, 4개의 여관, 여인숙외 중장비업, 부동산업도 등장했다. 그런 비영농 업종도 민통선 2,3세대들이 경영하고 있었다. 1978년 2,437명이던 인구는 2001년 11월 현재 1,540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인구통계는 실제 해안분지에 거주하는 인구와 많이 달랐다. 분지에서는 자녀들을 위한 '교육이주'가 유행하고 있었다. 분지에 살면서도 자녀의 학교가 있는 대도시로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방법이다. 실제로 분지의 인구는 남자 836명, 여자 704명으로 성비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대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는 춘천으로 마누라 주민등록을 옮겨놓았조. 서류상 난 홀아비입니다."
한 민통선 2세가 성비의 균형이 맞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Posted by 함광복

2007/07/13 13:25 2007/07/13 13:25


블로그 이미지

어떤 이가 내게 산맥을 넘어가 보라고 했다. DMZ속으로 연어 떼가 치닫는 시퍼런 남강(南江)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며, 고미성(古美城)이라고 하는 작은 성터도 있다는 것이다. 1984년 여름이었다.

- 함광복

Archives

Authors

  1. 함광복

Calendar

«   2010/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68972
Today:
32
Yesterday:
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