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 얼었던 땅이 풀리자 마자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모진 꽃, 늘 사람 곁에 살면서 발길에 밟혀도 또 일어나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 꽃, 꽃대 하나에 단 한 송이가 피지만 지거나 꺽이면 땅바닥에 펼쳐진 잎마다 교대로 꽃대를 내미는 지지 않는 꽃. 국화, 해바라기, 엉겅퀴 등 모든 두상화가 그렇듯 작은 꽃 하나하나는 보잘것 없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어야 비로소 한 송이가 되는 모여 피는 꽃, 그러면서 감광성 생리 때문에 아침 해를 맞으며 피기 시작해 해가지면 오므라드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꽃, 그리고 바람에 꽃씨를 싣고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가는 꽃. 민들레는 전선과 잘 어울리는 꽃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한 병사가 빈 벌판을 가보았을 것이다. 불 탄 트럭과 구멍 뚫린 철모 그리고 일그러진 포탄 껍데기들을 어루만지듯 민들레가 벌판 가득 노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고향이 그러웠다. 그날 밤 병사는 집으로 편지를 썼다. 그리고 편지지 맨 아래 칸에 늘 쓰던 '전선엣...' 대신 '민들레 벌판에서...'라고 썼다. 그렇게 '민들레 벌판'이 된 것일까.
민들레를 강한 생명력 때문에 억세나 마타리, 구절초 같은 야생식물로 알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풀은 산이나 들에 자라는 것들이고 민들레는 오히려 바랭이, 쇠비름, 방동사니, 조뱅이, 벼룩나물, 가래, 물달개비같이 논둑, 밭둑에 나는 잡초에 더 가까운 풀이다. 뽑고 또 뽑아도 돋고 또 돋고, 밟히고 또 밟혀도 나고 또 나는 이들, 억세게 되살아나는 풀. 그러나 잡초는 알고 보면 연약한 풀이다. 이들은 깊은 산이나 울창한 숲 속에서는 살지 못한다. 사람 곁을 떠나 살지 못하는 '동네식물'인 것이다. 한 때 전장의 한복판이었고, 그 후 오랫동안 사람은 살지 않고 가득 민들레꽃만 노랗게 물들인 벌판, 이윽고 바퀴살처럼 박힌 하얀 꽃씨들이 피어오를 벌판은 그냥 상상일 뿐이다. 민들레 벌판엔 민들레가 피지 않는다.
1987년 여름, '철원군지(鐵原郡誌) 편찬위원들은 2천 페이지가 넘는 증보판을 다시 쓰고 있었다. 지명유래를 쓰다가 민들레 벌판이 문제가 됐다. 전쟁 전에는 '먼들'. 그러나 떠났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군인들은 '먼들'을 '민들레 벌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싫지 않은 이름이지만, 그래도 왜 이름이 둔갑했는지 경위는 밝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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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내어도 또 파내어도 끝없이 솟아 나오는 크고 작은 '곰보돌'을 철원 사람들은 '멍돌'이라고 불렀으며 그 돌 벌판을 '멍돌뜰'이라고 명명했다. 멍돌뜰은 마을에서 멀었다. 논이나 밭으로 일구기 어려운 그 바위 밭엔 사람들은 좀처럼 가지도 않았다. 그 곳은 먼 들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들녘 너머 멀리 별로 쓸모없던 '멍돌뜰'은 '먼들'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지방의 방언음운은 'ㅓ'를 'ㅔ', 'ㅣ'. 'ㅡ'로 발음하는 버릇이 있다. 이 때문에 '먼들'은 '멘들'로 들리기도 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먼들'은 치열한 전장 한복판이 됐다. 이 벌판의 영문 이름이 미군의 작전지도에 등장했다.
'Mendle' 오로지 소리에 충실한 이름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걸 '민들레'로 읽기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민들레 벌판은 민간인 통제구역 속에 갇혀 버렸다. 북한군의 오성산 요새가 빤히 내려다 보고 있는 벌판은 은밀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들레 벌판은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 됐다. 그 곳을 'Mendle'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은 떠났다. 그러나 '먼들'의 옛 주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Mendle'이란 이름이 사라지자 '먼들'도 사라졌다. '민들레'만 남았다. 민들레가 피지 않는 '먼들'은 그렇게 민들레 벌판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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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벌판'속으로는 지뢰에 무지한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지뢰를 다스린다는 군인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땅속에 묻은 지뢰에 모두 겁먹고 있는 것이다. 그 오만한 지뢰도 자연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했다. 우선 나무와 풀이 지뢰밭을 점령해 버렸으며 뒤쫓아 들새, 산새, 너구리, 오소리 등 온갖 짐승들이 찾아와 지뢰가 있건 말건 자신들의 천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 그럴 뿐이다. 자연은 결코 지뢰를 점령하기 위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도망쳐 지뢰밭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지뢰는 결코 자연에 점령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에 기생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게 확실하다. 자연과 지뢰의 기막힌 공생인 셈이다. 지뢰가 없었다면 그 곳의 숲은 이미 오래 전 잘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곳의 숲은 자유분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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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민들레 벌판의 '민들레'는 '먼들'의 영문표기 'Mendle'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들레'는 혹시 지뢰의 암호명이 아니었을까?
"제군들 저 벌판에 민들레 꽃씨를 뿌리자, 지뢰를 묻자. 벌판 가득 피어있는 민들레 꽃밭처럼 드넓은 지뢰밭을 상상해보라. 그 민들레 꽃밭이 두려워 적군이 얼씬도 못할 것을 상상해 보라. 어서 민들레 꽃씨를 뿌리자, 지뢰를 심자. 그리고 이제부터 편안한 잠자리에 누울 수 있는 전선의 행복을 기대하자!"
장군은 그의 지뢰작전을 '민들레 작전'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들레 꽃씨를 뿌리듯 그 벌판에 지뢰를 묻지는 않았을까. 다만 '민들레 벌판'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위장해 놓은 것은 아닐까.
Posted by 함광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