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기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강자 편이었다. 나는 궁예가 사후1쳔 년만에 또다시 죽는 모습을 철원에서 보았다.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리자 뒤따르던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했다는 곳.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던 곳이다. 10세기 전 궁예왕이 군사들과 헤어지던 그 자리에서 1963년 8월 30일 오전 또 한 사람의 장군이 군사들과 헤어지고 있었다. 5.16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육군대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고 있었다. 육군 제5군단 비행장이었다. 당시 박대장의 전역식을 월간조선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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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후인 1969년 8월 30일, 이 역사적인 자리에 '국군장병 일동'의 이름으로 '육군대장 박정희 전역비'가 세워졌다. 6,453평의 부지에 1m 높이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39m키의 대리석 비석을 세웠다. 그때 '국군장병 일동'과 그의 전역사의 명 구절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이이 없도록 합시다'를 청동판 비문에 새겨 놓았다. 그러나 그 청동판은 지금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이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글귀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돌로 된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武人으로 限定된 삶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歷史보다 全人的으로 責任지는 길을 擇할 것인가. 아픔이 따르는 心慮를 거쳐 大我를 爲하여 小我의 超脫을 決斷하고 永遠한 겨레를 爲하는 가시밭길을 選擇한 朴正熙 陸軍大將께서 1963년 8월 30일 萬感이 交叉하는 心情으로 여기서 軍門을 떠나셨다. 이 歷史的인 순간과 運命的인 場所를 記憶하기 爲하여 戰友로서 生死苦樂을 함께한 血盟의 將兵一同은 깊은 感銘과 자랑을 담아 이곳에 비를 세운다.」
아무도 그 비문이 언제, 어떻게, 왜 바꿔치기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철원 사람들은 그 시기가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 사건' 쿠데타와 '12.12사태'의 역쿠데타 그리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이 선출되던 정치 소용돌이의 시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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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 새 임금으로 왕건왕이 왔으면 섬기면 되지, 무엇 하러 쫓겨난 왕을 들먹거려. 궁예를 잘 못 들먹거렸다간 다쳐!"
그때 술 취한 한 노인이 나섰다. 노인들은 그를 '똥별'이란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육군 하사관 출신이었는데, 자신을 진급 심사에서 아깝게 탈락한 대령 출신이라고 과장하며 아직도 노병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군탄공원에서 역사는 늘 강자 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궁예는 영원히 '복권'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누구도 궁예의 편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그땐 궁예를 연구하는 사람도 궁예 나라의 유적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궁예를 꼭꼭 감춰두고 있는 그 장막이 언젠가는 벗겨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장막을 한 꺼풀만 들춰내면 철원은 10세기 동안이나 감춰뒀던 궁예 왕국을 고스란히 내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는 1천 년 동안이나 궁예를 너무 깔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로 나는 철원을 가면 '궁예 할아버지'의 수택이 묻혀 있을만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Posted by 함광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