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이 일어난 그 해로부터 1,000년 전인 904년 궁예는 철원에 도성을 지었다. 그리고 경원선을 착공한 그 해로부터 1,000년 전인 905년 그 도성으로 천도했다. 두 사건 사이에는 정확하게 10세기의 시공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역사의 '궁예 죽이기'는 그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추가령 열곡 띠의 철길 놓기는 둥예의 나라 흔적을 마치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지워버린 20세기의 사건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지도 위에 찍혀 있는 36개의 역과 그 사이로 이어진 철길이 피의 사실의 증거물들이다. 경원선은 궁예의 나라 태봉국의 왕도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궁궐이 있던 도성 한가운데를 잔인하게 찢어놓고있다. 이제 그 역사 훼방꾼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궁예도성은 방어시설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기록은 궁예도성의 성곽은 밑은 돌로 쌓고, 위는 흙으로 쌓았다고 돼 있다. 외성의 높이는 4~12척, 폭 2~6간, 내성은 높이 7척에 폭 12척, 외성의 어떤 곳은 높이가 120cm밖에 안 되는 낮은 성이다. 내성도 높이가 210cm 밖에 안 된다. 궁예는 철원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에 10여 개의 성을 쌓고 왕도를 방어하는 산성전략을 구사했다. 그렇다면 그들 산성은 어디일까. 철원 동송읍 양지리의 성모류성은 궁예가 군마를 사육하던 곳으로 밝혀졌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며 항전했던 중어성(옛 철원군 묘장면 대마리)과 보개산성(포천군 관인면 중리), 궁예가 군사를 해산할 때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명성산성(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도 왕도의 외곽성이다. 나머지 6~7개의 성도 지금 어느 산 위에 허물어진 채 묻혀 있을 것이다. 이들 산성을 추정해 내긴 어렵지 않다. 철원평야 주변에는 궁예도성을 중심으로 13개의 산성이 있다. 알려진 중어성, 보개산성, 명성산성을 포함해 자모(慈母)산성(김화읍 읍내리), 승양(承陽)산성(옛 철원군 인목면 승양리), 통사동(桶寺洞)고성(옛 김화군 금성면 상리), 청룡(靑龍)산성(평강군 현내면 하복리), 성황당산성(평강읍 북쪽), 유진(楡津)산성(평강읍 북쪽), 고소(姑蘇)산성(평강읍 서쪽), 신성(新城:평강군 현내면 하주리)등이다. 자모산성은 최근 석축연대가 통일신라시대로 밝혀졌다. 그러나 나머지 산성들은 언제, 누가 그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없다. 성황당산성은 둘레 280M의 작은 성, 보개산성은 둘레가 4,210m나 되는 가장 큰 성이다. 그러나 외로운 이들 산성은 아직도 '자기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아무도 밝혀주지 않고 있다.
한반도 지도를 펴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철원은 반도의 한 복판이란 말이 실감난다. 거리상으론 물론이고 무게, 부피에서도 중심일 것 같다. 역사적으로 철원이 부상했던 것은 이같은 중심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곳 해발 200~500m의 끝없는 용암대지 위로 연간 1,300mm에 이르는 충분한 비가 내려준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물이 충분한 넓은 땅은 구석기시대부터 인류를 유인했던 게 틀림없다. 강원대학 고고학팀이 2000년부터 철원 한탄강 유역에서 대규모 구석기 유물유적을 찾아 내놓고 있는것이 그 물증이다. 선사시대엔 대부족사회가 형성돼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한탄강와 남대천을 따라가며 대대, 울골, 샘골, 무랑골, 절골, 탕골, 부엌골, 되룡골, 갈골, 불당골까지 15km에 늘어서 있는 고인돌이나 토성리의 흙성이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사 속에는 백제 온조왕 22년 '말갈족이 내침하자 평강에서 격파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삼국시대 초기, 철원은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백제 개로왕 18년(472년)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했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며 국경을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5세기께 철원은 고구려가 지배했다고 보아야 할 증거다.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했다. 그 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세력까지 축출했다. 따라서 궁예가 도읍할 때까지 적어도 370년 동안 철원은 신라 땅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삼국은 그렇게 뺏고 빼앗기며 좋은 목을 골라 성을 쌓았을 것이다. 점령군은 적군의 성을 보수해 아군의 방어시설로 활용했을 것이다. 학자들이 철원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산성들의 나이를 대개 삼국 각축기로 잡는 것은 이같은 추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궁예도 철원을 도읍지로 정하며 그 고성들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개축했을 것이고, 전략적으로 취약한 곳에 새로운 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가 멍청하지 않았다면 백제, 고구려, 신라가 실전으로 검증한 전략 요충을 무시하고, 산꼭대기마다 새로운 성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다. 13개의 이들 산성이 모두 궁예의 외곽성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비로소 궁예의 나라 수도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게 됐다. 왕도는 도성 풍천원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평강, 동쪽으로 금성과 김화, 남쪽으로 포천까지 사방 40여 km에 이르고 있었다. 궁예는 거대한 현무암 대지 철원평야를 몽땅 왕도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를 집어삼키고,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려던 궁예는 그의 왕도가 적어도 경주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 918년 왕건 지지파의 군사역모로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그이 철원 왕도 건설의 꿈은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1천 년 후, 추가령 열곡의 긴 골짜기를 따라 경원선이 났다. 이 철도는 대광역에서 평강역까지 북동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린다. 비운의 궁예를 비웃듯 옛 그의 왕도를 찢어놓고 있다. 남북한이 단절된 지금 남쪽의 신탄에서 북쪽의 가곡 사이 14km엔 철길이 걷혀 있다. 그 사이로 DMZ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DMZ를 가로질러 끊긴 철도를 다시 잇는 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반도의 급변하는 정세는 어느새 이 철도가 DMZ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게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이 철도가 놓여지던 '백년전의 흉계'를 눈치채는 사람이 없다. 그 DMZ안에 지금 궁예도성이 갇혀 있다. 그리고 그 도성을 대각선으로 찢으며 경원선이 지나고 있다.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한 그 해로부터 꼭 천 년이 도던 그 해, 일본인들은 한 왕조의 왕도를 가로지르고 궁궐 터를 박살내며 철도를 내는 흉계를 꾸몄다.
패거리들이나 쓰는 '깐 이마 또 까'란 저속한 말이 있다. '생채기를 낸 바로 그 자리에 또 생채기를 내 준다'는 잔인한 의도가 담겨 있다. DMZ속의 철도 잇기를 말릴 명분이 없는 한 생채기 난 궁예도성은 이제 새 생채기를 입게될 운명이다. 마치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려는 것처럼 역사는 '슬픈 왕' 궁예를 너무 괴롭힌다.
Posted by 함광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