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능선 사이에 들어앉아 있는 벌판은 늘 아름다웠다. 듬성듬성 졸린 듯 서 있는 큰 나무들은 가지치기를 해 준 것 처럼 줄기의 잔가지들이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었다. 구불구불 작은 강이 갯버들 숲을 이루며 기어가고 있고, 숲과 숲 사이에는 아직 소 떼가 지나가지 않은 것 같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소리 없이 날아가는 벌판 속으로 가는 금이 그어져 있었다. 옛 철길이거나 금강산으로 간다는 옛 도로의 자국일 것이다. 지구에 마지막 남았다는 냉전 전선의 풍경은 의외로 그토록 목가적이다.

....... 중략

"우리에게 천적은 없다."
고라니 따위가 백수의 왕 노릇을 하며 속절없이 종족을 번식시켜 갈 것이다. 그러나 속단이다. 누군가 그들의 천적 노릇을 대행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그 곳은 야생동물에게조차 결코 평화스러운 곳이 아니다. 산불은 그들의 서식처를 불태워 버렸고, 가랑잎 속에 몸을 감춘 발목지뢰, 나뭇가지에 매달린 부비 트랩도 먹이를 찾아 나서는 그들을 기다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벌판을 말잔치장이나 야외 음악회장으로 만들고 있는 고출력의 확성기 소리에도 시달려야 한다.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철책선의 불빛, 고지의 부처님 오신날 연등, 까마득한 높이까지 점멸 꼬마전구가 매달린 크리스마스 트리도 신경 거슬리는 것들이다. 군막사와 벙커, 둔탁한 굉음을 내는 장갑차나 육중한 트럭, 어디서나 불쑥불쑥 나타나는 무장한 군인 등은 너무 겁나는 것들이다.

....... 중략

자연은 적절히 적응하거나 그럴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었을 것이다. 식물은 화공작전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초지로 변신했으며 그렇게 할 수 없는 큰 키 나무들은 불타 사라졌다. 야생동물들은 불빛과 소음, 군인이나 총소리를 진저리치며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차츰 그게 자신들을 위협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고라니 떼, 채소나 곡물, 농약과 비료와 트렉터 그리고 사람의 냄새가 배어있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에 철책선을 어슬렁거리는 산양이나 멧돼지 떼, 그들은 길들여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적응에 성공한 야생동물만 지금 남북의 양쪽 능선에서 쏟아지는 확성기 말싸움을 '서울말', '평양말'로 구별해 내며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근거는 없지만.....

오로지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바람에 인간은 반세기 전, 그 곳에 가둬 둔 자연이 얼마나 고통 받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인간이 '그곳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자연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거나 말거나, 그곳의 자연은 제 살길을 찾아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DMZ, 그 곳엔 우리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나라가 있었다.

Posted by 함광복

2007/02/27 02:13 2007/02/27 02:13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dmzline.com/rss/response/4

DMZ는 어디일까? 어떤이는 서울 북쪽에 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가기만 하면 DMZ가 나온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그 곳이 높은 산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이는 넓은 들판이라고 말했다. '여기가 DMZ'라고 가르쳐 주는 자료는 없었다. 그 곳은 막연히 남한의 북쪽 끝에 있었다.

....... 중략

DMZ는 오로지 임진강변에서 출발해 동쪽을 향해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가 동해안에서 끝나는 폭 4km, 길이 240km의 띠다. 그 띠는 6개의 큰 강을 건너고, 1개의 평야를 횡단하며 2개의 산맥을 타 넘어가는 동안 벌판과 산기슭, 강 유역에 70개 마을을 가둬두고 있다. 임진강 하구의 정동(井洞)을 지나면 경의선 철도가 지나가던 마을 서장(西場), 동장(東場)이며 이어 판문점(板門店)이다. 오탄(伍炭), 중사(中沙), 진곡(辰谷)은 임진강이 비무장지대를 횡단하며 만들어 놓은 강 마을이다.

....... 중략

내가 첫 DMZ 여행을 떠나던 1985년 그 해 이미 민통선 북방마을은 114개, 휴전협정 '사민(私民)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협의'를 근거로 1953년 8월 DMZ 속 한가운데 세운 대성동 '자유의 마을'까지 합하면 총 115개 마을이나 됐다. 8,799세대 3만 9,725명이 그 속에 살고 있었다.

DMZ 여행이란 바로 그 민통선 지역 여기저기를 가보거나, 남방한계선이 지나가는 높은 고지에 올라가 DMZ 속을 들여다보는 아주 싱거운 여행법이다. 더구나 길이 없는 곳은 갈 수 없었으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갈때는 반드시 자동차를 타고 가야 했고, 반드시 해가 뜬 후에 민통선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해가 지기 전에 그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상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있었다. 그 곳엔 아직도 사람이 돌아오지 않은 98개의 마을이 있었으며 높은 고지에 올라가면 DMZ 속에 묻혀있는 빈 마을과 강과 산이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DMZ 속의 빈 마을로 이어지는 길과 강과 산줄기 뒤편엔 북한 땅이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Posted by 함광복

2007/02/26 21:24 2007/02/26 21:24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dmzline.com/rss/response/3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산맥 너머에 남강이 흐르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남쪽의 강'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강이 왜 산맥 너머 북쪽에서 흐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연어를 본 일도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어미연어는 어른의 허벅다리만 하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어려서 먼 바다로 떠났다가 어른이 되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새 생명을 잉태시켜 놓고 죽는다는 그 물고기는 내게 상상의 물고기였다. 장수하늘소, 오래 전 사라진 그 곤충에 대해서도 억센 턱과 망토를 걸친 것 같은 멋진 날개를 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천연기념물까지 산맥 너머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쾅쾅 가슴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 중략

"장수하늘소를 보셨나요?"
나는 그 귀한 곤충을 노인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물어봤다.
"우린 그놈을 게 벌레라고 하지요. 바다의 게처럼 집게가 있거든."
"고미성이란 작은 성도 있다면서요?"
"금강산엔 작은 성이 많아요. 성터가 있으니까 고미성이라고 이름 붙였겠지."

노인까지 산맥을 한번 넘어가 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꼭 한번 산맥을 넘어가 보고 싶었다. 노인이 두고 온 고향의 연어 떼와 장수하늘소 그리고 작은 성(城)은 말할 것도 없고, 초가집들과 우물터, 유점사 가는길과 성황당, 찰벼를 심던 고논과 목화밭들이 사람이 떠난 빈 마을에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곳은 갈 수 없는 곳이다. DMZ, 그 곳에서는 낙엽이 떨어지는 바스락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며, 새가 놀라 하늘로 치솟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 중략

1985년 여름 나는 DMZ가 끝나는 동해안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동호리에서 DMZ가 시작되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변까지 민간인 통제구역속의 '여행허가'를 받았다. 단, 두 가지 주문을 받았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들은 '잘 훈련된 북한군이 특수 제작한 커다란 가위로 한국군 초병의 목을 잘라간다'는 소문에 불안해 했다. 바로 그런 불확실한 정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어떤 무기가 어디에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를 알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Posted by 함광복

2007/02/23 14:53 2007/02/23 14:53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www.dmzline.com/rss/response/2


블로그 이미지

어떤 이가 내게 산맥을 넘어가 보라고 했다. DMZ속으로 연어 떼가 치닫는 시퍼런 남강(南江)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며, 고미성(古美城)이라고 하는 작은 성터도 있다는 것이다. 1984년 여름이었다.

- 함광복

Archives

Authors

  1. 함광복

Calendar

«   2010/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68822
Today:
51
Yesterday: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