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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평야의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도시 여행은 늦가을이 좋다. 아카시아나무 숲에 가려 있던 평강고원의 둥근 어깨가 DMZ 너머로 드러나고, 동쪽 서쪽의 먼 검은 산들이 성큼다가서는 11월이 좋다. 수확이 끝난 평야는 이미 텅 비어버렸고, 벌판 귀퉁이로 띠처럼 이어진 지뢰밭 숲에서는 나무이파리들이 힘을 잃고 있을 때다. 논둑, 농로, 수로 등 평야의 속살이 드러나자 뽀얗게 햇볕을 뒤집어쓰고 있는 신작로 옆으로 여름내 보이지 않던 무너진 시멘트 기둥과 벽채, 주춧돌들이 얼굴을 내밀고, 작은 내에 걸려 있는 녹슨 철교는 햇볕에 익어 더 검불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텅 빈 하늘로 두루미 몇 쌍이 날아가는 날이면, "보름이나 빨리 왔네." 라든가 "아니지, 작년에 왔던 그날에 딱 맞춰 왔어." 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벌판 끝까지 퍼지고 덩달아 노인들은 아무나 붙잡고 벌판이 간직한 옛날 얘기 하기를 좋아 할 것이다. 한국 전쟁과 함께 사라진 도시,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구 철원읍은 이때쯤에서야 전설이 되어 되살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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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사람들에겐 2개의 철원이 있다. 민통선 이남의 철원과 민통선 이북의 철원이다. 구 철원읍은 민통선 이북의 철원평야, 그 가운데서도 노른자위 땅으로 구 철원군청 소재지였으며 월하(月下), 중리(中里), 관전(官田),사요(四要), 외촌리(外村里)등 5개 마을이 이마를 맞대고 있던 곳이다. 사라진 이 마을들로는 자전거도 달려 올라갈 수 있는 낮은 고개가 넘어간다. 북쪽을 향해 마치 말굽쇠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낮은 산을 밖에서 안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마루 옛 관전리에서는 늘 북쪽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골짜기에서 퍼져나간 작은 벌판은 점점 넓어지다가 멀리 평강고원에 맞닿아 있었고 둥근 그 고원의 끝은 언제나 하늘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사요리는 관전리 바로 아래, 중리는 오른쪽 산등성이 너머, 외촌리는 막 철원평야가 시작되는 곳쯤에 있던 마을들이다. 구 철원읍은 바로 이 말굽쇠처럼 생긴 낮은 산을 에워싸고 평야를 향해 앉아 있었던 셈이다. 이 도시는 넓은 들은 농경지로 쓰고, 시가지는 가능한 산에 기대어 앉히려 했던 게 역력했다.

이 말굽쇠산을 1980년대까지는 멀리서 식별할 수 있도록 빨간 야구 모자를 쓴 출입영농자, 아이들은 안 되고 오직 성인남녀만 넘어갈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쯩'으로 통하는 출입증명서를 소지한 사람만 게시판처럼 생긴 판자에 출입증을 걸어놓고 넘어갔다. 2000년대에는 검문소 전자 감식기에 바코드 카드를 집어넣었을때 OK 사인이 떨어진 사람만 넘어갔다. 그들에게 허용된 민통선 체류시간은 '아침 해가 떠서 저녁 해가 질때까지'만이다. 아무일도 할 일이 없는 여름은 민통선의 하루가 여간 지루한게 아니다. 그러나 모를 내는 봄철이나 수확을 해야하는 가을은 민통선의 하루가 너무 짧다. 평야 끝에 걸린 저녁 해와 숨바꼭질을 하다 쫒기듯 트렉터, 경운기, 오토바이, 자전거를 몰고 민통선을 빠져 나와야 한다. 그들에게 구 철원읍의 도시유적들은 시커멓게 썩은 시멘트 더미일 뿐이다.

안보관광객을 실은 버스는 철원 철의 삼각전적기념관에서 출발해 철원평야 북쪽에서 민통선 북방지역으로 진입하게 마련이다. 이들은 제2땅굴, 철의 삼각전망대, 백마고지 전적기념관을 거쳐 구 철원읍이 시작되는 그 말굽쇠산에서 민통선을 빠져 나간다. 일단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면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버스에서 내려서는 안 되며 똑딱이 카메라이더라도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곳이 아니면 아무 데나 들이대서는 안 된다. DMZ나 민통선의 넓은 들을 카메라에 담아서는 안되며 종이에 그려서도 안 된다. 민통선은 대북유연성이 까마득하게 떨어지는 곳이다. '북괴'라는 단어가 사라진지 오래됐는데도, 민통선에서는 아직도 그말이 북한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안보관광은 오직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 자유인 지독한 여행이다. 말굽쇠산은 그런2시간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곳이다.

"민통선을 빠져 나왔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다."
버스는 더 속력을 붙여 말굽쇠산을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누구도 이 말굽쇠산을 무심히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1937년 일본이 발간한 철원읍지에는 당시 철원읍 인구가 4천269가구, 1만9천693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교5, 은행4, 행정기관34, 여관, 식당, 술집은 103군데나 됐다. 1932년 작은 촌락이 읍으로 승격된 이래 커다란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90년대 초 발행된 철원군지는 1945년 8월 15일 현재 철원읍 인구가 3만7천855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교나 은행 등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도시 최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노동당사와 동주금융조합과 철원군청, 수도국, 종연방적 등의 폐허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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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서 만난 한 노인은 "철원역은 2차대전 때 B-29 폭격을 맞고 파괴됐다."고 말했다. 구 철원읍은 일본이 패망하기 전부터 이미 부서지고 있었다는 단서다. 또 어떤 노인은 1956년 여름 "3층집 철원 제일교회 지붕 밑에서 비를 피했다."고 말했다. 벽채만 남아있는 이 교회가 마지막 부선진 것은 전쟁 후였다는 증언이다. 그러나 이도시를 앗아간 것은 어째든 한국 전쟁이다. 20세기 초, 구 철원읍은 지금 영회세트로나 불 수 있는 조금 복잡한 시골 장거리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1945년까지 그 도시엔 일본의 현대건축들이 비집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5년은 북한의 건축물들이 지어졌을 것이다. 그 도시를 전쟁이 박살낸 셈이다.

그렇다면 이 폐허의 도시유적을 재건하지 말고 고스란히 보전하자고 한 이는 누구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DMZ일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이 지금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은 근대 한국건축, 북한의 행방공간 건축 유적을 민통선 속에 보호했을 것이다.

Posted by 함광복

2008/02/09 23:14 2008/02/09 23:14

원산에서 서울까지 전개된 좁고 낮은 긴 골짜기, 추가령 열곡은 한반도 두개의 큰 단층이 엇갈려 만나는 띠의 무른 쪽 화강암이 더 깍여나가 만들어진 저지대이다. 1914년 8월 16일, 이 띠에 기찻길 경원선이 났다. 이 철도는 일본의 승전 기념물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은 한국으로 부터 서울~의주 간 군용철도에 이어 서울~원산 간 또 하나의 군용철도 부설권을 강탈했다. 이듬해 전쟁은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럴수록 일본은 한반도를 가로질러 러시아로 가는길이 필요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일본은 1905년 11월 경원선을 착공했다. 경성역(서울역)에서 원산역 사이에 용산, 서빙고, 왕십리, 청량리, 성북, 창동, 의정부, 주내, 덕정, 동두천, 초성, 전곡, 연천, 대광, 신탄, 철원, 월정, 가곡, 평강, 복계, 이목, 검불랑, 성내, 세포, 삼방, 삼방협, 신고산, 석왕사, 용지원, 남산, 안변, 배화, 갈마등 역이 생겼다. 1914년 9월 16일 이들 36개 역을 연결하는 225km 철길위로 첫 기차가 달렸다. 대협곡을 따라 한반도 횡단 철도가 개통됐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그 해로부터 1,000년 전인 904년 궁예는 철원에 도성을 지었다. 그리고 경원선을 착공한 그 해로부터 1,000년 전인 905년 그 도성으로 천도했다. 두 사건 사이에는 정확하게 10세기의 시공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역사의 '궁예 죽이기'는 그때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추가령 열곡 띠의 철길 놓기는 둥예의 나라 흔적을 마치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지워버린 20세기의 사건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지도 위에 찍혀 있는 36개의 역과 그 사이로 이어진 철길이 피의 사실의 증거물들이다. 경원선은 궁예의 나라 태봉국의 왕도 한가운데를 가르고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궁궐이 있던 도성 한가운데를 잔인하게 찢어놓고있다. 이제 그 역사 훼방꾼을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

궁예도성은 방어시설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기록은 궁예도성의 성곽은 밑은 돌로 쌓고, 위는 흙으로 쌓았다고 돼 있다. 외성의 높이는 4~12척, 폭 2~6간, 내성은 높이 7척에 폭 12척, 외성의 어떤 곳은 높이가 120cm밖에 안 되는 낮은 성이다. 내성도 높이가 210cm 밖에 안 된다. 궁예는 철원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에 10여 개의 성을 쌓고 왕도를 방어하는 산성전략을 구사했다. 그렇다면 그들 산성은 어디일까. 철원 동송읍 양지리의 성모류성은 궁예가 군마를 사육하던 곳으로 밝혀졌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며 항전했던 중어성(옛 철원군 묘장면 대마리)과 보개산성(포천군 관인면 중리), 궁예가 군사를 해산할 때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명성산성(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도 왕도의 외곽성이다. 나머지 6~7개의 성도 지금 어느 산 위에 허물어진 채 묻혀 있을 것이다. 이들 산성을 추정해 내긴 어렵지 않다. 철원평야 주변에는 궁예도성을 중심으로 13개의 산성이 있다. 알려진 중어성, 보개산성, 명성산성을 포함해 자모(慈母)산성(김화읍 읍내리), 승양(承陽)산성(옛 철원군 인목면 승양리), 통사동(桶寺洞)고성(옛 김화군 금성면 상리), 청룡(靑龍)산성(평강군 현내면 하복리), 성황당산성(평강읍 북쪽), 유진(楡津)산성(평강읍 북쪽), 고소(姑蘇)산성(평강읍 서쪽), 신성(新城:평강군 현내면 하주리)등이다. 자모산성은 최근 석축연대가 통일신라시대로 밝혀졌다. 그러나 나머지 산성들은 언제, 누가 그 성을 쌓았는지 알 수 없다. 성황당산성은 둘레 280M의 작은 성, 보개산성은 둘레가 4,210m나 되는 가장 큰 성이다. 그러나 외로운 이들 산성은 아직도 '자기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 아무도 밝혀주지 않고 있다.

한반도 지도를 펴 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철원은 반도의 한 복판이란 말이 실감난다. 거리상으론 물론이고 무게, 부피에서도 중심일 것 같다. 역사적으로 철원이 부상했던 것은 이같은 중심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곳 해발 200~500m의 끝없는 용암대지 위로 연간 1,300mm에 이르는 충분한 비가 내려준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물이 충분한 넓은 땅은 구석기시대부터 인류를 유인했던 게 틀림없다. 강원대학 고고학팀이 2000년부터 철원 한탄강 유역에서 대규모 구석기 유물유적을 찾아 내놓고 있는것이 그 물증이다. 선사시대엔 대부족사회가 형성돼 있었던 게 틀림없다. 한탄강와 남대천을 따라가며 대대, 울골, 샘골, 무랑골, 절골, 탕골, 부엌골, 되룡골, 갈골, 불당골까지 15km에 늘어서 있는 고인돌이나 토성리의 흙성이 그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사 속에는 백제 온조왕 22년 '말갈족이 내침하자 평강에서 격파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삼국시대 초기, 철원은 백제 땅이었던 것이다. 백제 개로왕 18년(472년) 고구려가 한성을 함락했다.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며 국경을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5세기께 철원은 고구려가 지배했다고 보아야 할 증거다.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했다. 그 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세력까지 축출했다. 따라서 궁예가 도읍할 때까지 적어도 370년 동안 철원은 신라 땅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삼국은 그렇게 뺏고 빼앗기며 좋은 목을 골라 성을 쌓았을 것이다. 점령군은 적군의 성을 보수해 아군의 방어시설로 활용했을 것이다. 학자들이 철원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산성들의 나이를 대개 삼국 각축기로 잡는 것은 이같은 추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궁예도 철원을 도읍지로 정하며 그 고성들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개축했을 것이고, 전략적으로 취약한 곳에 새로운 성을 쌓았을 것이다. 그가 멍청하지 않았다면 백제, 고구려, 신라가 실전으로 검증한 전략 요충을 무시하고, 산꼭대기마다 새로운 성을 쌓지는 않았을 것이다. 13개의 이들 산성이 모두 궁예의 외곽성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비로소 궁예의 나라 수도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게 됐다. 왕도는 도성 풍천원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평강, 동쪽으로 금성과 김화, 남쪽으로 포천까지 사방 40여 km에 이르고 있었다. 궁예는 거대한 현무암 대지 철원평야를 몽땅 왕도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를 집어삼키고,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려던 궁예는 그의 왕도가 적어도 경주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 918년 왕건 지지파의 군사역모로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그이 철원 왕도 건설의 꿈은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1천 년 후, 추가령 열곡의 긴 골짜기를 따라 경원선이 났다. 이 철도는 대광역에서 평강역까지 북동쪽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린다. 비운의 궁예를 비웃듯 옛 그의 왕도를 찢어놓고 있다. 남북한이 단절된 지금 남쪽의 신탄에서 북쪽의 가곡 사이 14km엔 철길이 걷혀 있다. 그 사이로 DMZ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DMZ를 가로질러 끊긴 철도를 다시 잇는 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반도의 급변하는 정세는 어느새 이 철도가 DMZ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구체적 계획까지 세우게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이 철도가 놓여지던 '백년전의 흉계'를 눈치채는 사람이 없다. 그 DMZ안에 지금 궁예도성이 갇혀 있다. 그리고 그 도성을 대각선으로 찢으며 경원선이 지나고 있다.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한 그 해로부터 꼭 천 년이 도던 그 해, 일본인들은 한 왕조의 왕도를 가로지르고 궁궐 터를 박살내며 철도를 내는 흉계를 꾸몄다.

패거리들이나 쓰는 '깐 이마 또 까'란 저속한 말이 있다. '생채기를 낸 바로 그 자리에 또 생채기를 내 준다'는 잔인한 의도가 담겨 있다. DMZ속의 철도 잇기를 말릴 명분이 없는 한 생채기 난 궁예도성은 이제 새 생채기를 입게될 운명이다. 마치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려는 것처럼 역사는 '슬픈 왕' 궁예를 너무 괴롭힌다.

Posted by 함광복

2007/11/13 01:38 2007/11/13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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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부터 철원에서 왕이 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철원으로 가기 위해 엉뚱하게 반대 방향인 명주(溟州:강릉)로 갔다. 북쪽으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갔다. 그의 행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 같았지만 그는 북원(北元:원주)을 떠날 때 이미 용의주도하게 대장정의 루트를 그리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훗날 자신이 통치할 땅덩어리의 크기를 발로 밟아 재고 있었으며 자신이 다스릴 백성들을 말 등에 않아 불러모으고 있었다.

지름길을 두고도 먼길을 돌아가는 전략. 영웅들은 종종 이런 전략을 즐겼다. 현대사에서는 모택동의 대장정이 그 우회전략의 백미다. 1949년 10월 1일. 모(毛)는 베이찡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모는 그 자리와 그 순간을 위해서 15년 전인 1934년 홍군을 이끌고 중국 남부 루이진(金)을 떠나 위뚜(于都)의 작은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가을 달빛이 길을 밝히던 10월 16일이었다. 그는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구의 주름살 같은 중국 남서부 대산맥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 2만km 떨어진 대륙 북쪽 싼시성(陝西省) 위지(昊旗)에 나타났다. 위뚜강을 도하한지 1년 만인 1935년 10월 19일. 그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 서쪽으로 갔으며 중국 대륙을 장악하기 위해 되각했다. 그 사건은 아직도 '20세기의 사건 중 그처럼 강력하게 세계의 상상력을 사로 잡은 사건은 없었으며 그토록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도 없었다' 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태어난 에너지원이 바로 그 사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기 896년 궁예는 철원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하면서 국가를 선포했다. 궁예는 그때를 위해 4년 전 북원(원주)를 떠났다. 홍군이 위뚜강을 건너던 때처럼 그때도 10월. 가을이었다. 그는 양길(梁吉)로부터 얻은 6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양길은 신라정부의 과도한 세금독촉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을 때, 북원(北原:원주)에서 봉기해 큰 세력을 이끌고 있었으며 궁예가 양길의 명을 받고 동쪽으로 떠날때, 이미 그는 북원과 국원(國原:충주)을 근거지로 한강 중류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궁예가 더 깊은 내륙, 한강 상류를 빼앗아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궁예는 태백산맥을 넘어 한반도의 동쪽 끝으로 가 사라져 버렸다. 3년후. 궁예는 엉뚱하게 북원의 북쪽, 반도의 서쪽인 철원에 나타났다. 궁예의 그 대장정 사건은 경주의 신라 왕조, 전주의 견훤, 철원이 궁예로 3각 세력구도가 형성되는 후삼국 시대, 9세기 말 한국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를 개막시켰다. 그 후 궁예를 군사 쿠데타로 축출한 왕건이 고려를 세워 한반도를 평정했지만, 그 기틀은 이미 궁예시대에 만들어졌다. 사실 왕건의 고려는 궁예의 '빼앗긴 나라'의 재건이다. 따지고 보면 고려의 한반도 통일의 에너지원은 바로 궁예의 대장정, 그 사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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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주를 떠나 철원까지 간 '궁예의 길'은 여전히 미궁이다. 중국 남서부 대산맥 속으로 사라진 홍군이 그때 아무도 모르게 대설산을 넘고 있었던 것처럼 한반도 동쪽 바닷가에서 사라진 궁예도 아무도 모르게 한반도의 등뼈 태백산맥을 넘어 철원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란 추측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군사작전은 불가능하다. 철원은 명주의 서북방, 한반도를 대각선으로 횡단해야 만날 수 있는 지점이다. 이 대각선 루트는 이미 궁예가 배신한 양길의 강력한 군사력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곳곳에 역시 적(敵)인 신라의 군사력이 미치고 있었다. 그는 대각선 루트를 택하지 않은게 틀림없다.

-----중략-----

궁예의 그길은 지금 따라가 볼 수 없다. 금강산과 향로봉산맥 사이 삼재령으로 이어지는 깊은 계곡은 지금 DMZ가 고스란히 깔고 앉아 있으며 그사이로 무심히 남강이 흘러 해금강 앞에서 바다를 만나고 있다. 외포, 내포, 고미성, 사천, 사비리 등 강마을은 반세기 동안 비어 있는 마을이다. 서희구도 DMZ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서희령에서 발원해 서희구에서 소양강을 만나는 성내천은 DMZ에 묻혀 있는 하천이다. DMZ는 다시 서희령을 넘서 사태리 계곡으로 쳐 박혔다가 단장의 능선을 타넘어 문등리 계곡으로 들어가고 있다. 화천에서 금성으로 가는 옛 금강산 가던 길은 주파령 너머에서 끊겨있다. 금성천변의 등대, 세현리도 지금 사람이 살지 않는 DMZ마을이다. 금성은 지금 북한 땅. 금성에서 김화로 가자면 남대천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건너다니던 그 곳은 지금 DMZ가 건너가고 있다. 김화에서 철원 풍천원에 이르는 작은 벌판과 골짜기와 한탄강가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달려가던 곳이다. 그러나 그 곳도 지금 DMZ가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DMZ한가운데 풍천원에 궁예의 천년고도가 잠들어 있으며 공교롭게도 궁예의 길 위로 지금 DMZ가 지나가는 것이다. 궁예는 그의 서진로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그 길은 처음엔 궁예의 나라 국경이었지만 훗날 고려통일의 출발선이 되었다. 한국 사람들도 DMZ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 처음엔 DMZ가 남북의 '국경'이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화해와 통일의 출발선으로 고쳐 생각하기 시작했다.

Posted by 함광복

2007/10/08 20:41 2007/10/0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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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내게 산맥을 넘어가 보라고 했다. DMZ속으로 연어 떼가 치닫는 시퍼런 남강(南江)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며, 고미성(古美城)이라고 하는 작은 성터도 있다는 것이다. 1984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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