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弓裔)

궁예도성 남대문 석등(石燈) 사진은 이미 오래 전 원본이 사라졌다. 철원군지(鐵原郡誌)는 천 번도 더 찍어냈을 복사판 사진을 싣고 있었다. 어느 책에 나온 우표딱지만한 흑백사진을 잡아 늘릴 수 있는데까지 확대한 게 틀림없었다. 사진 속으론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사체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뚫려 있었다. 제주도 돌하루방 같았다. 철원도 제주도처럼 현무암 대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곰보돌'의 고장이다. 그 사진만으로는 석등은 조악한 그 곰보돌 조각에 불과했다. 애꾸눈 궁예왕이 지천으로 나뒹구는 '곰보 바위'하나를 들어다가 아무렇게나 쓱쓱 깎아 도성 남대문 앞에 턱 세워 놓았을것만 같았다.

그러나 석등은 일본이 1940년 7월 30일자로 국보 118호로 지정했던 키 280cm 짜리 화강암 돌조각이다. 철원의 궁예도성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보다도 2세기 후에 축조됐다. 따라서 그 석등은 석가탑이나 다보탑보다도 더 정교하고 품위있게 다듬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석등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이젠 국보도 아니다. 그 석등처럼 태봉국의 왕 궁예(弓裔. ?~918)도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 있다.

후삼국 시대는 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궁예는 그 가운데 단 18년 동안 태봉을 통치했다. 그리고 그 후 역사는 더 드라마틱한 사건들을 만들며 10세기나 진행됐다. 왕의 치적을 들춰내며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들먹이기에 1천 년 전은 너무 오래 된 일다. 그러나 나는 궁예 나라의 옛 수도 철원을 갈 때마다 역사가 그를 너무 깔아 뭉갰다고 생각했다.

우선 철원평야 사람들을 '왕을 돌로 쳐 죽인 백성의 후손들'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그때 백성에게 피살되던 궁예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918년 6월) 이리하여 (궁예가)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가니 궁녀들이 궁 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왕건)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도망하였으나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서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 먹다 바로 부양(평강)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는 평강 땅 삼방(三防)에서 너무 배가고파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 밭일을 하던 농사꾼들에게 들켰다. 농사꾼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폭정과 괴벽의 엉터리 애꾸눈 왕을 장수나 군졸도 아닌 무지렁이들이 통쾌하게 교살했다'고 행간 곳곳에서 속삭이고 있다. 그리고 궁예가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왕은 애꾸눈의 장애인이었고, 자신을 메시아라고 여긴 미륵신앙의 광신도였으며 부인과 자식을 쳐죽인 정신분열증 환자였다. 결국 피신길에 보리이삭을 훑어 먹다가 농민에게 붙들려 돌에 맞아 죽은 인격 파탄자였다'고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개국공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렇게 궁예를 깍아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왕건의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이미 궁예는 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죽여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륵의 세상을 갈망하던 하층농민들이 미륵불을 돌로 쳐 죽인 무지함, 백성이 왕을 쳐 죽이 대역죄, 즉 자식이 어버이를 쳐 죽인 패륜을 고스란히 철원 사람들의 옛 조상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그것은 강자의 횡포였다. 그리고 중대한 실수였다. 철원 사람들은 궁예가 그의 최후를 당당하게 맞았다는 전설을 따로 간직하고 있었다.

궁예전설은 노인들을 통해 구전되기도 하고, 철원군지에 기술돼 있기도 했다. 어떤 노인들은 전설 속의 '궁예'를 '궁예대왕'이라고 지칭했다. '궁예대왕', 그 지칭은 철원사람들의 불명예, '미륵을 죽인 무지함과 왕을 죽인 대역죄, 자식이 어버이를 죽인 패륜'에 대한 항변같기도 했으며 책에서 배운 정사(正史)를 엉터리라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전설 속의 궁예의 최후는 절대 비굴하지 않았다. 왕건의 군사 역모가 있던 날, 왕은 자신의 나라 도읍지를 마지막으로 순방한 것 같다. 그날 밤 왕은 남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 나왔다. 숨을 가다듬기 위해 찾아갔던 첫 피신처는 도성 서남쪽의 중어성. 평원 한가운데 세운 도성의 전략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외곽에 세웠던 12개 산성 가운데 한 요새다. 현재 위치는 철원읍 대마리. 왕은 이 요새를 버리고, 더 서쪽으로 나가 현 연천군 신서면 승양리의 역시 외곽성인 승양산선으로 들어갔다. 또 다른 외곽성 보개산성(현 포천군 관인면)은 승양산성의 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어느새 더 동쪽의 명성산성(현 철원군 갈말읍)으로 들어가 최후 보루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산성에서 군대를 해산한다. 그리고 통곡하는 군사들을 뒤로하고 홀로 북쪽으로 떠난다. '명성'(鳴聲)이란 말뜻을 굳이 풀이한다면 '큰 울음소리'. 훗날 사람들은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었다고 해 그 산성을 '울음산성', 산성이 있는 그 산을 '울음산'이라고 불렀다. 명성산성에서 해산했지만 충성스러운 많은 군인들이 왕이 걸어간 길을 뒤따라 군탄리까지 왔다. 왕은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그 곳이 바로 그때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한 곳'이며 '군탄'은 거기서 유래했다고 해석했다. 갑천(甲川)은 평강 하갑리 동북쪽의 작은 내. 왕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양성하던 검불랑 군사훈련장을 지나 삼방협의 깊은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자결했다.

육당 최남선도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궁예 최후의 전설을 '풍악기유'에 이렇게 실었다.
「남루한 차림의 고려왕(궁예)이 발 붙일 땅을 찾기 못하고 심벽한 석을 찾아 삼방 골짜기로 들어왔다. 삼봉 최고지에 올라 은피하여 재도할 땅을 둘러 볼 즈음 문득 한 스님을 만나 혹시 용잠호장할 땅이 없겠느냐고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이 속에를 들어와서 살길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다. 이에 크게 절망하고 그 곳에서 깊은 연못을 향해 그대로 몸을 던지니 물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강자 편이었다. 나는 궁예가 사후1쳔 년만에 또다시 죽는 모습을 철원에서 보았다. "나를  따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한탄강을 건너가 버리자 뒤따르던 군사들이 슬피 울며 탄식했다는 곳.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후 육군 대장으로 전역하던 곳이다. 10세기 전 궁예왕이 군사들과 헤어지던 그 자리에서 1963년 8월 30일 오전 또 한 사람의 장군이 군사들과 헤어지고 있었다. 5.16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육군대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고 있었다. 육군 제5군단 비행장이었다. 당시 박대장의 전역식을 월간조선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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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후인 1969년 8월 30일, 이 역사적인 자리에 '국군장병 일동'의 이름으로 '육군대장 박정희 전역비'가 세워졌다. 6,453평의 부지에 1m 높이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4.39m키의 대리석 비석을 세웠다. 그때 '국군장병 일동'과 그의 전역사의 명 구절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이이 없도록 합시다'를 청동판 비문에 새겨 놓았다. 그러나 그 청동판은 지금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이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글귀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돌로 된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武人으로 限定된 삶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歷史보다 全人的으로 責任지는 길을 擇할 것인가. 아픔이 따르는 心慮를 거쳐 大我를 爲하여 小我의 超脫을 決斷하고 永遠한 겨레를 爲하는 가시밭길을 選擇한 朴正熙 陸軍大將께서 1963년 8월 30일 萬感이 交叉하는 心情으로 여기서 軍門을 떠나셨다. 이 歷史的인 순간과 運命的인 場所를 記憶하기 爲하여 戰友로서 生死苦樂을 함께한 血盟의 將兵一同은 깊은 感銘과 자랑을 담아 이곳에 비를 세운다.」

아무도 그 비문이 언제, 어떻게, 왜 바꿔치기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철원 사람들은 그 시기가 1979년 '10.26 박정희 시해 사건' 쿠데타와 '12.12사태'의 역쿠데타 그리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이 선출되던 정치 소용돌이의 시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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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 새 임금으로 왕건왕이 왔으면 섬기면 되지, 무엇 하러 쫓겨난 왕을 들먹거려. 궁예를 잘 못 들먹거렸다간 다쳐!"

그때 술 취한 한 노인이 나섰다. 노인들은 그를 '똥별'이란 별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는 육군 하사관 출신이었는데, 자신을 진급 심사에서 아깝게 탈락한 대령 출신이라고 과장하며 아직도 노병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군탄공원에서 역사는 늘 강자 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궁예는 영원히 '복권'하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누구도 궁예의 편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그땐 궁예를 연구하는 사람도 궁예 나라의 유적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궁예를 꼭꼭 감춰두고 있는 그 장막이 언젠가는 벗겨질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장막을 한 꺼풀만 들춰내면 철원은 10세기 동안이나 감춰뒀던 궁예 왕국을 고스란히 내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역사는 1천 년 동안이나 궁예를 너무 깔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로 나는 철원을 가면 '궁예 할아버지'의 수택이 묻혀 있을만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Posted by 함광복

2007/08/30 01:05 2007/08/30 01:05

1950년대 민통선 속에 방치된 황무지가 개척되기 시작했다. 지뢰에 민간인이 희생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개척민과 지뢰의 전쟁이 시작됐다. 아마 그 전쟁은 지구가 머지않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될 '인간과 지뢰의 전쟁'의 서막이었을 것이다. 민통선 개척민들은 지뢰밭이라면 어디든 농지로 바꿔 놓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독충들도 그대로 당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억세고 현명한 민통선 개척민들조차 자신들 앞에 손을 들게 만들었다. 민통선 지역은 40여 년만에 거의 다 농지로 개간됐다. 지뢰와의 싸움에서 인간이 완승한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뢰는 결코 인간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다. 아직도 수많은 '민들레 벌판'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지뢰밭은 백두대간, 서해안, 남해안 그리고 서해 외딴섬까지 진출하며 옛날보다 더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뢰는 최초 전쟁에서 기막히게 인간을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자신들이 어수룩해 보이게 하는 기만전술을 쓴 셈이다. 바로 지뢰는 머리를 밟고있는 동안은 절대로 터지지 않고, 발을 떼는 순간 터진다는 그 엉터리 정보가 그것이다. 그 무렵 나온 전쟁영화들까지도 그 엉터리 정보에 현혹돼 어처구니 없는 지뢰 상식을 퍼뜨렸다. 예를 들면 지뢰밭에서 꽃 피운 전우애를 그리면서 지뢰는 발로 머리를 밟고 있는 동안 절대 터지지 않는 멍청한 무기로 묘사하는 것 따위다.

수색조의 꼴통인 일등병은 이번 작전에서도 말썽을 부렸다. 수풀을 헤치고 가던 그이 몸이 갑자기 말뚝처럽 굳어 버렸다. 분대장을 행해 고개를 돌린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서는 비 오듯 땀이 솟고 있었다. 분대장은 직감적으로 그가 지뢰를 밟고 있다고 알아차렸다.
"움직이지 마라!"
대검을 빼어 든 분대장은 어느 새 일등병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일등병의 워커 밑에 깔린 대인지뢰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누르고 대검으로 지뢰를 캐내 능숙한 솜씨로 뇌관을 분리해 버린다.

민통선 개척민도 지뢰는 발을 뗄 때 터지는 굼뜬 무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뢰를 밟으면 영화속의 용감한 분대장과 같은 군인이 달려 올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서 있어야 한다는 안전수칙을 퍼트리기도 했다. 땅 속에서는 쇠붙이가 빨리 녹슬기 때문에 전쟁 때 묻은 지뢰들은 삭아 없어졌거나 터질 힘도 없다는 무식한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지뢰에 대해 떠돌고 있는 정보는 모두 엉터리였다. 많은 개척민들이 자신이 지뢰를 밟았을 때 였는지, 발을 떼었을 때였는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무참히 당하고 또 당했다. 지뢰에 녹이 슬었는지, 아닌지 분간할 새도 없었다. 지뢰는 항상 숨죽이고 숨어 있었으며 심지어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도 살아남아 개척민이 걸어오길 기다렸다.

"지뢰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체중이 실리는 순간 터져 버리는 대단히 재빠른 무기인데도 누가 무엇 때문에 발을 뗄 때 터지는 굼뜬 무기라는 소문을 냈을까. 누가 무엇 때문에 세월이 가면 지뢰도 작은 쇠붙이에 불과하다는 소문을 냈을까."

개척민들이 그런 후회를 하고 있을 때는 이미 민통선에서 벌어진 인간과 지뢰와의 첫 싸움에서 인간의 참패가 결정됐을 때다.
그러나 인간과 지뢰와의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민통선 마을에 '지뢰잡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대개 왕년에 지뢰를 매설해 보기도 하고, 제거해 보기도 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스스로 지뢰에 관한 한 도사들이었다. 그들은 신출귀몰한 솜씨로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지뢰들을 찾아냈다. 그들이 한 바퀴 돌아 나온 숲에서는 지뢰사고가 나지 않았다. 개척민들은 그들을 고용했다. 어느 마을에 기막힌 솜씨를 가진 '지뢰잡이'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를 초빙해 오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미국 서부개척사의 '총잡이' 같았다. 수풀 속의 악당들은 이제 그들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1998년 여름, 나는 한 전설적인 '지뢰잡이'를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 만났다. 젊어서는 직업군이, 전역후에는 '지뢰잡이'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68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전력이 밝혀지는 것을 몹시 꺼렸다. 그는 지뢰는 국방을 위해 매설한 국가의 재산이며 따라서 이를 캐어내는 것은 불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노인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이웃 사람에게 물어 본다든가, 읍사무소에서 거주자 명단을 들춰 본다든가 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이름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지키고 있다. 그런 신뢰 때문에 그는 나를 만나면 반가워 한다.
"지뢰를 100개쯤 캐 보았습니까?"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20개쯤?"
너무 숫자가 많은 것 같아 다시 물었다.
"군대생활 할 때까지 합하면 600~800개는 될 걸. 집중력을 요구하는 위험한 일이야."

그이 얘기를 듣는 동안 공장 굴뚝 쌓기나 고층건물 유리창 닦기 같은 아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듯이 지뢰를 캐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뢰잡이'는 고수익 직종이었다.
지뢰밭 1평을 낱낱이 뒤져 안전한 땅으로 확신시켜주는 댓가는 1~3만원. 1,000평이면 최고 3,000만원을 버는 셈이다. 당초부터 지뢰를 묻지 않은 땅이어서 단 1개의 지뢰도 찾아내지 않고도 수십, 수백 만 원을 챙기는 재수좋은 날도 있었다.
"그때 한 밑천 톡톡히 잡았나요?"
"날이면 날마다 불려 다닌게 아니니까. 그리고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은 아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 일에서 손을 뗀 것도 꿈 속에서 백발노인이 현몽했기 때문인가요?"
그러나 노인이 '지뢰잡이'에서 손을 뗀 것은 의외의 이유 때문이었다.
남북관계가 호전돼 가면서 민통선 북방지역, 특히 끊긴 국도주변의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5번국도 주변 '지뢰미확이지대' 땅 값은 평당3만원이나 호가했다. '지뢰잡이'의 용역비도 평당 3만원, 결국 지뢰밭을 평당6만원식 주고 사는 셈이다. 개간 비용까지 합하면 도무지 채산이 맞지 않았다. 정말 통일이 머지 않았다면 굳이 돈 들여 논을 풀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부동산 부자가 되고, 그 때 가서 되팔든지, 별장을 짓든지, 가든을 짓든지 하는 편이 현명하다. '지뢰잡이'는 결국 수요가 없어 시나브로 사라진 것이다. 민통선의 땅값 상승은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계속 정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지뢰를 파낼 필요성도 더 없어질 것이다.

-----중략-----

결국 지뢰는 인간의 가슴 속에 우글거리는 오해, 증오, 저주, 분노,도발, 보복 따위를 자양분으로 배양돼 태어난 독충이다. 그리고 '지뢰백신' 그것은 그 독충이 무서워 쩔쩔매고 있는 자연. 지뢰독충들을 점령하는 동안 오해, 증오, 저주, 분노, 도발, 보복 따위에 면역력이 생긴 '민들레 벌판'에서 찾을 수 있는 물질이다. '지뢰백신'을 가슴 속에 접종받은 이는 절대 지뢰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그 백신을 세상에 퍼뜨리면 지구의 지뢰는 증가 속도가 매우 줄어들 것이다.

나는 정말 '지뢰백신'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참할 뜻이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요즘도 편지를 쓰고 있다. 편지 앞머리는 소설가 이외수(李外秀)의 감성사전 '인간'의 항목을 그대로 베껴 쓰고있다. 그 글이 지구에 독충을 묻어두고, 급기야 그 앞에서 벌벌 떠는 인간의 치졸함을 족집게로 뽑아낸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지구에 기생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이기주의적이로 지능이 발달한 영장류.
지구에 기생하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많은 전쟁무기를 가지고 있다. 여러 번의 핵실험을 통해 대기권 안의 전 생명체들을 멸종의 지름길로 인도하고 각종 폐기물을 통해 대기권 전역의 생태 변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으나 지구에 기생하는 어떤 생명체도 숙주인 지구를 파괴하는 법은 없으며 오직 인간들만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은 자연에게서 많은 것을 착취해 왔으나 자연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은 가장 조화된 것은 가장 진화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상태이며 안다고는 하더라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다. 자신들의 껍질에 가리워져 스스로의 참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본론을 쓰고 있다.
「지뢰(地雷)는 인간이 만든 그 많은 전쟁무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DMZ는 인간이 만든 그 많은 전쟁무기들을 시험해 보던 지구상의 여라 장소 가운데 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은 인간이 만든 무기 가운데 너무 잔악해 인간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지뢰가 묻혀 있는 지구상 여러 장소 가운데 한 곳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지뢰를 보고 두려워 떨고 있는 동안 자연은 그 곳을 두려움 없이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 곳의 지뢰를 캐어내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서 그 나무를 '평화나무'라고 명명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렇게 지구 위의 지뢰밭을 평화나무밭으로 조금씩, 조금씩 바꿔나가는 일을 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Posted by 함광복

2007/08/23 13:34 2007/08/2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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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반(反)지뢰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997년 11월 6일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KCBL)가 발족됐다. 이미 한국 밖에서는 그 해9월17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전 세계 89개 참가국의 합의로 '대인지뢰금지협약'을 통과시켜 놓고 있었다. 그런 외풍에 힘입어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가 발족했지만 한국에선 아직 반지뢰 운동이 시기상조였다. 우선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태클을 걸었다. 미국은 '대인지뢰의 생산과 사용을 즉각 중지해야 하고, 10년 이내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해야 한다'는 이 협약에서 한반도 DMZ의 지뢰는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기 위한 특수한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국제대인지뢰대책회의(ICBL)나 '반(反)지뢰' NGO들이 인정할리 없었다.
"좋다. 그러면 우린 나가겠다."
미국은 한반도 DMZ가 예외지역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대책회의에서도 탈퇴했다. 어차피 중국이나 러시아 등 지뢰강국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는 마당에 미국이 대책회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국대인지뢰대책회의 밖의 상황은 더욱 좋지않게 변해갔다. '대인지뢰금지협약'은 1999년 3월 1일 43개국의 비준을 얻어 발효됐다. 그리고 2000년 9월 15일 제2차 국제대인지뢰금지조약 당사국 회의 때는 가입국이 139개국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지뢰 강국들 즉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한국, 파키스탄, 이집트, 이스라엘, 이란은 이 협약을 외면하고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139개 가입국이 보유하고 있는 지뢰는 고작 2,500만 개다. 그러나 9개 미가입국의 보유지뢰는 2억 2,500만 개에 달했다. 협약 발효 후 1,900만 개의 지뢰가 폐기됐다. 그러나 그런 반지뢰운동은 '지뢰 약소국들만의 잔치'였다.

-----중략-----

강원도 철원의 한 민통선 북방지역엔 마을 사람만 아는 '지뢰무덤'이 있다. '지뢰무덤'이란 개간지에서 파낸 지뢰를 한 곳에 모아 작은 돌무덤처럼 쌓아 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철원군 갈말읍에서 만난 40대 농민은 그 무덤을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대를 물려 만든 그 무덤은 고인돌이나 패총 같은 현대한 선사유적 같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건 절대 비밀이라며 나를 그 곳으로 안내해 주지 않았으며, 그 무덤의 위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의 말을 빌면 농지를 개간할때 '저기 지뢰가 있다'고 공개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짓이었다. 개간지의 지뢰는 반드시 군부대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개간지에서 발견된 지뢰는 군인들에게도 골치 아픈 존재다. 군인들은 일단 지뢰가 발견된 지역은 지뢰표지판을 세우고 다음 조치를 기다린다. 지뢰표지판이 세워진 지역은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농지개간은 거기서 끝이다. 따라서 농민들에게는 혹시 지뢰가 발견되더라도 신고하지 않는 쪽이 늘 유리했다. 그 '지뢰무덤'은 그렇게 생겼다는 것이다.

"위험할 텐데 지금이라도 그 '선사유적'을 발굴해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그렇게 걱정하자 그는 민통선에서는 지뢰피해자가 되고 안되는것은 팔자소관이라고 말했다. DMZ군이들에게 '지뢰군번'이 있듯이 민통선 농민들에게도 '지뢰주민등록번호'가 있다는 것이다. 군번(軍番, service number)이란 군인 각자에게 부여되는 고유번호이다. 인식표(認識票, idintification tag)는 군인의 성명과 군번, 혈액형이 새겨져 있는 길이 5cm, 폭 3cm의 타원형의 얇은 알루미늄 판이다. 모든 군인은 인식표를 잠잘 때, 샤워를 할 때도 항상 목에 걸고 있도록 되어 있다. 인식표가 전사자나 부상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그 인식표에 새겨진 군번 가운데는 '지뢰군번'이 있다고 믿고 있다. DMZ수색조는 맨 앞에 선 분대장이 반드시 지뢰를 밟는 것은 아니다. 확률상 맨 앞 사람이 지뢰에 가장 위험하지만, 사고는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맨 뒷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뢰를 밟는 것은 군인이 될 때부터 군번과 함께 '운명의 장난'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주민등록번호는 출생신고 때 받아 사망신고 때 말소되는 한국인의 고유번호다. 민통선 사람들도 '지뢰주민등록번호'가 있다고 믿고 있다. 지뢰밭을 들어가는 사람이 다 지뢰를 밟는다는면 아마 드넓은 철원평야나 파주평야는 개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많은 민통선 사람 가운데 지뢰를 밟는 몇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주민등록번호와 함께 지뢰를 밟는 '팔자소관'도 부여 받았다는 것다.

민통선 사람들은 지뢰패해자를 그렇게 '지뢰주민등록번호'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이라고 분류하고 있었다. 일단 가장이 지뢰사고로 사망하거나 다리를 잃은 세대는 노동력을 상실해 더 이상 농지를 확장할 수 없었으며, 이웃과 품앗이도 할 수 없게 됐다. 지뢰패해자들은 가난을 대물림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만손씨 같은 사람은 정말 팔자가 기구한 노인이다. 민통선 사람들은 대개 맨몸으로 민통선 북방지역에 입주했다. 지뢰가 그들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라놓은 것이다.

Posted by 함광복

2007/08/22 11:31 2007/08/2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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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가 내게 산맥을 넘어가 보라고 했다. DMZ속으로 연어 떼가 치닫는 시퍼런 남강(南江)이 흐르고, 강가 무시무시하게 깊은 서어나무 숲엔 장수하늘소가 우글거리며, 고미성(古美城)이라고 하는 작은 성터도 있다는 것이다. 1984년 여름이었다.

- 함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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